붓다의 가르침은 늘 인간의 속성을 경계한다. 그것은 종교인이든 지도자이든 시대의 영웅이든 예외가 없다. 그래서 이미 몇 천 년 전부터 현대 미국문화의 실용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등 사회적 속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인식론이다. 놀랍게도 물질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래 과학의 방향성과 연구과제는 인식론과 인간의 의식 자체에 대한 분야이다. 그리고 그 준비과정에서 뇌 과학과 명상이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해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긴 시간 탐구의 과정을 가져왔었다. 내 집에 없는 것이 남의 집에 있다면 왠지 가지고 싶은 탐욕심이 발동하고 안타깝게도 내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인식보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습관을 모방하기 바빴다. 그리고 비싼 외제차를 타면 어떨까 하고서 선망했던 시절에서 어느 날 자신이 그 외제차를 타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곤 점점 욕망에 따른 물질적인 부자놀이를 체험하게 되고 이러한 반복을 통해 점차 외부세계에 대한 기대와 경험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다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생각과 의식들이 거품 또는 착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믿고 있었던 고정관념들로부터 탈피하는 순간인 것이다. 서서히 사람들의 의식은 확장되어지고 사회는 부동산과 학벌의 거품을 빼기 시작한 것처럼 마침내 생각과 의식의 거품을 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고 대상보다는 인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치 돈을 벌기 위해 한 세월을 몰두했던 사람이 어느날 그것에 구속되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경우들이 종종 주변에서 일어난다. 우리 정신의 것과 자신의 길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있어서 사람마다 입장과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동일한 대상에 대해 느끼는 욕구, 가치 등이 다르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그들이 경험한 모든 희노애락이 사실이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진실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정사유(正思惟)이다.
우리 주변에는 신, 하느님, 하나님, 한울님, 마음 등 복잡하고 관념적인 단어들이 가득하다. 이 얼마나 복잡한 개념들인가. 특히 이런 단어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러나 이것을 진정 이해하는 사람들은 사실 드물다. 이것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 또는 관념일 뿐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 대한 이해수준도 천차만별이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제각각, 서로는 동일한 단어를 다른 개념을 갖고 사용하고 있게 된다.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과 오해, 관념과 맹신의 틀 안에서 믿음의 폭력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평화를 도외시하는 종교적 지도자는 매우 위험한 인물인 것이다. 특정한 것을 신성시 한다는 것은 분리심과 갈등 등 사회문제의 유발요인이 된다. 거꾸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 “신성, 불성, 하나님 등”이 얼마나 다를까. 차라리 세상 모든 것이 신성한 것이다. 저 돌맹이와 티끌 속에도 신, 부처, 한울님이 있거늘 관념에 도취된 사람들이 자기 것을 만들고 신성시 한다. 가령 “돌맹이님 도와주세요”하고 강하게 기도를 한다면 어찌될까. 불교의 가르침은 이 모든 것에 불성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동일하게 소원성취가 된다고 얘기한다.
이제는 우리의 의식수준이 누가 이러한 잘못된 개념을 끝까지 고집하며 그리고 그들의 불편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어야 할 때가 왔다. 종교를 비롯한 전 인류의 지상과제가 행복이라면 결국 개인과 사회문제의 최종적인 해결방향은 인간의 내면적인 속성을 간과할 수 없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접근 가운데 하나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성인과 위인들은 오염된 이것들과 시름을 했으며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결안을 제시했다. 사람 또는 사회는 관념의 믿음을 의지하기보다 그 내면적 속성을 물어야 하며, 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