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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60년과 납북화가 임군홍

등록일 2013-09-11 02:01 게재일 2013-09-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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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곤대구 대백프라자 갤러리 큐레이터
올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왔던 6·25전쟁이 발발한지도 벌써 63주년이 되는 해다.

남북을 가로막고 서 있는 휴전선으로 인해 부모형제간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못했던 지난 역사는 이제 남북간 경제협력을 통해 상호 호혜적 관계로 발전해가고 있으며,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고 있다.

남북화해의 상징인 개성공단 조성은 지난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협력의 하나로 시행된 사업이었다. 개성공단이 조성되기 이전인 1998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50년만에 남한의 민간인이 자유롭게 북한 땅을 밟았던 금강산관광이 새롭게 시작되어 전 세계로부터 또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남북관계는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아픔을 이겨내며 변해왔던 것 같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는 지난 한국전쟁 당시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갈등 속에서 북쪽을 선택해야 했던 서양화가 임군홍의 유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비록 박수근과 이중섭 처럼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30~1950년대 국내 화단에서 그 누구보다 활발한 작품활동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화가였다.

박수근과 이중섭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월남했다면 임군홍과 이쾌대, 김용준 등은 정치적인 갈등이 심화되었던 남한을 거부하고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1980년 후반까지 우리미술사에서 금기시 되었던 예술가가 되었다.

서양화가 도입된 이후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한 임군홍은 예술가라는 외로운 길을 걸으며 다양한 작품세계와 실험적인 화풍을 펼친 전업화가였다. 디자인과 광고를 취급하던 광고사를 운영하며, 미술의 대중화를 이끌어 가기도 하며 때로는 대규모 작품전을 통해 꽤 많은 작품들을 거래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주 활동무대는 협전과 조선미전이었으며 국내화단이었다. 하지만 한정된 전시여건과 열악한 미술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39년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다양한 작품활동과 여행을 통해 다량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북경의 고궁과 다채로운 이국적 풍경을 통해 서양미술의 다양한 화풍들을 익혀 나갔으며 서양의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작가들에 대한 연구와 그들의 작품들을 통해 임군홍 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기 위해 끝임 없이 노력을 경주했다.

해방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화폭에 담으며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지만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여름, 작품 `가족`을 제작하던 와중에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현재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으며 이번에 전시된 `가족`을 보게 되면 당시 긴박했던 상황들이 눈앞에 어렴풋이 그려진다. 엄마의 품에 안기여 편안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어린아이와 작가의 시선을 피해 어느 곳을 응시하며 깊은 사색에 잠긴 여인과 소녀의 표정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해 준다.

임군홍이 미완의 작품 `가족`을 남겨두고 북으로 간지도 이제 60년이 지났다.

그동안 경색됐던 남북의 관계도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화해모드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제 한국근대화단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쳤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해 북쪽을 선택해야 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족들도 이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기억들을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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