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자타 못은 무한 경쟁의 터전이었다. 그 터전에는 오직 일등만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시어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 가장 뒤처진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질문을 하신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혼자 힘만으로 안 되는 현실에 부딪쳐 남모르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의 처지에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그렇다. 혼자만으로 살아가기엔 한계가 있듯이 그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일은 공허하다”고 했고 존 러스킨은 “사랑과 기술이 합쳐질 때, 걸작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은퇴를 하신 어떤 분은 혼자 힘만으로 삶의 터전을 개선하기에 힘겨워 하는 이들을 찾아가고 있다. 그들의 말벗이 되어 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스틴 처칠은 “우리가 얻는 것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뿐이지만 가진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인생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은퇴 후의 삶으로 미래세대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멋진 사랑의 손길을 보면서 삶의 걸작을 기대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을 두고 “선을 행하기 위해 본성에 더해진 도움”이라고 했다. 즉 내적 도움으로 정의하면서 이를 사랑과 동일시했다.
시인 박용재는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살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 만큼 산다”고 했다. 때론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와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인생나그네”까지를 사랑하도록 했다.
삶의 희노애락과 상승과 하락의 곡선이 교차하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마는 그때마다 특정한 것만 취한다면 삶은 결국 절뚝거리게 된다. 시인의 결어처럼 “그만큼이 인생” 되기 위해 삶의 폭과 깊이를 사랑으로 확장하고 심화하여야 겠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까지 확장하셨다. “내가 한 가지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다.” 김수환 추기경은 많은 이들을 도왔다. 그 정신이 지금도 `바보` 통장의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 집 주인에게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도록 요청하신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으로 이미 이러한 이들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이 주어져 있다고 했다.
바오로는 필립비공동체에 그 내적 힘을 알려 주었다.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한자를 펼쳐 놓고 임의로 해석해 보곤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설립(立) 자인데, 아래의 수평을 땅으로 위의 수평을 하늘로 두고 그 사이에 너와 나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하늘은 한계라고 가정하게 되면 너와 나는 이 땅에 위에서 한계 아래에 놓여 있는 존재가 된다. 여기까지는 한자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와 내가 함께 하늘 위, 한계 위에 희망이란 하나의 점을 둠으로써 비로소 의미가 완성된다.
무한 경쟁의 터전에서 혼자 고전분투하며 생을 마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군가와 마음을 합쳐 한계를 뛰어 넘는 희망을 목표로 함으로써 자신과 이웃을 함께 세울 것인지 선택의 몫. 한 쪽 만을 두고 온전하다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다른 한쪽을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일상 만나는 사람에게만 잘하는 수준을 넘어 함께 만든 희망으로 너와 나 온전히 설수 있는 환경이 필요로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