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 시작되자 마자 고속도로가 붐빈다. 휴가를 떠나는 승용차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문득 휴가란 게 쉰다는 뜻인데, 왜 모두들 힘겨운 여행길에 나서는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실제로 누구라도 집을 떠나 여행을 하다보면 모든 일이 마땅치 않게 마련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이 가슴을 찌른 게 한 두번인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휴가여행을 떠난다. 직장에 매인 샐러리맨으로서 일상의 탈출을 꿈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여행은 삶에 있어 재충전의 기회인 것은 틀림없다. 이국에서 만나는 이방인의 얼굴과 삶의 모습들, 비좁은 한반도를 벗어난 대륙 어느곳의 장대한 자연경관이나 오랜 역사의 유적에서 우리들은 불현듯 자신의 본 모습을 찾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이 좋다고 한다. 여행을 통해 어제의 생각을 비우고,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으로 자신을 채우고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가여행일 수 있다.
어쨌든 느긋한 초가을 휴가를 꿈꾸는 필자는 진땀나고 분주한 해수욕장이나 기념품 판매에만 열 올리는 유명 관광지 답사는 될수록 사양한다. 가능하다면 이웃 나라가 자랑하는 장대한 자연경관이나 문화유산, 아님 삶의 현장이 살아있는 전통시장들을 둘러보는 테마여행이라면 좋겠다.
어떤 여행을 떠났든 돌아오는 장면을 연상할 때면 나는 언제나 미당 서정주 시인이 `국화꽃옆에서`에서 노래한 풍경을 동경한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란 구절이 뇌리를 맴돈다. 젊은 시절의 격정과 치기가 사그라든, 수굿한 모습의 누님이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란 얼마나 차분하고 정돈된 모습인가. 난 그 모습을 떠올릴 때 마다 내 삶의 현 주소를 새롭게 추스리게 되는 나를 확인하곤 한다.
잘 알려진 넌센스 퀴즈 가운데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금이 뭘까요?” 정답은 “지금”이다. 흔히 생각하듯 황금이나 소금이 아니다. 황금이나 소금이 귀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살아가는 삶 전체의 무게와 맞먹는다`는 깨달음이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은 지금, 즉 시간이라고 믿는다. 소중한 만큼 이 자산을 쓰는 결정은 무척 신중할 수 밖에 없다. 휴가여행을 떠나 (지금) 시간을 쓴다는 결정 역시 쉽지 않다. 게다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소중한 지금(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부모에게든, 연인에게든, 나의 신에게든 그저 마음만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찾아가고, 내 맘을 그 앞에서 전하고, 그 앞에 머무르며 대화하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이의 자세다.
설령 조금 힘들어도 시간을 내어주기 불가능한 경우는 없다. 월남전에서 먼저 떠난 전우에게 30년 넘게 찾아와 해마다 인사를 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이 믿는 신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깊은 어둠이 가시기 전 시각에 가장 맑은 정신으로 새벽기도를 간다. 부모를 사랑하는 이 땅의 수많은 자녀들이 전화로 안부를 전해도 될 터지만 해마다 추석과 설이면 민족 대이동에 합류해 부모님을 찾아간다. 휴일의 달콤한 소파를 포기하고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는 아빠, 잠을 덜 자고라도 아내의 수다를 들어주다가 결국에 꾸벅꾸벅 조는 남편, 그런 모습들이 사랑이다.
최근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한 경남 밀양에서 휴가를 보내며 주민들과 소통에 노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새벽이나 밤에도, 다들 노는 주말에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고, 일에 대한 열정이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여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