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나 있으면 내가 왜 한국 사람이 되었나 생각하게 된다. 순전히 우연일 뿐, 우연에 필연이 깃들어 있었을 뿐 나는 한국인이 아니 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본에 와서 나도향 소설을 읽는다. 나도향이 남긴 작품들 가운데, ‘벙어리 삼룡’과‘뽕과 물레방아’를 읽고, 나도향은 얼마나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가 생각한다. 1902년생인 그가 1925년에 벌써 이런 소설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 스물네 살에 그는 삼룡이나 안협댁이나 이방원의 처 같은 인물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만큼 삶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다.
하지만 나는 나도향이 말한 이불을 내가 어떻게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자꾸 이불을 보고 싶은데, 정작 그 이불의 실쳬는 보이지 않는다.
이불이란 어떤 사람이 믿는 바 신앙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를 믿고 따르는 이는 불교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며, 예수를 믿고 복종하는 이는 기독교라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이다.
각자 캄캄한 자기 이불속 세상에서 하늘을 보고 저것이 세상의 끝이려니 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 하늘을 찢어야 새 세상, 새 하늘이 보이지 않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내 자신이 뼛속까지 한국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한국인이라 믿고, 어떤 거대한 힘이 나를 ‘브라질’이나 ‘아이슬란드’로 영영 보내버리지 않는 한 그렇게 살다 죽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당신은 어느 폴리스의 사람이냐고 묻자 자기는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정한 세계시민 사상의 연원은 이 디오게네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내게 당신은 코스모폴리탄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옛날에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할 것이다.
한때 여행을 좋아하고, 낯선 곳에 앉아 있는 나를 보기를 즐겨해서 이곳 저곳 멀리 떠돌아다니고자 했다. 하지만 늙어서까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자,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자는 고독하다 못해 추방된 자의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일본은 참 특이한 곳이다. 하얼빈에 있을 때만 해도, 동아시아가 지금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아느냐, 우리는 낯선 사람들과 뒤섞여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호기롭게 생각했던 것이, 이곳에 와서는 사람에게는 고국이 있어야 하고, 내가 의존할 만한 전통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불을 쓰고 있어도 좋으니 그 이불이 나쁘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불을 수선해서라도 이불속 세상이나마 좋게 만들어가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한다.
일본에서는 며칠 전 참의원 의석을 조정하는 선거가 있었다. 자민당이 압승을 했다. 아베 신조 수상이 6년전의 설욕을 했노라고 일갈을 했다. 6년전에 자민당이 정권을 내줬던기? 이로써 일본은 다시 전후 체제로 돌아가버렸다. 한때 집권당이기도 했던 민주당은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하시모토인지 하는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유신회라는 고색창연한 이름의 정당도 그리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 바야흐로 2차대전 직후 체제로 귀환했다고 할 수 있다. 시대가 잠시 ‘반동’이 있기는 했으나 역사를 움직이는 큰 물결에 합류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시대에 무엇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살아야 하나를 생각한다. 부질없는 정치 투쟁도 싫다. 세계시민 운운 하는 포즈도 싫다. 이불을 찢어버리는 것도,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것도 싫다. 나도향 소설의 인물들처럼 이불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도에 대해 생각한다.
일본에 와서 우리 한국을 생각하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내 이불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