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다. 제우스신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인인 판도라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뒤 호기심도 함께 주었다. 그런 후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절대로 열지 말라는 말과 함께 상자 하나를 주는 데, 이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준 상자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열게 된다. 제우스는 이 상자 안에 온갖 불행의 씨앗을 넣어두었는데, 그 씨앗들이 죄다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판도라가 서둘러 상자 뚜껑을 덮었지만 상자안에 남은 것은 `희망`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 `판도라의 상자`로 여겨졌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른바 `사초(史草) 실종`사건이다.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취지의 발언이 있었느냐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대화록 열람·공개 논란`을 거쳐 `사초(史草) 폐기 논란`으로까지 번졌다가 끝내 `사초 실종`으로 결론나는 분위기다.
여야에서 선발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위원들은 22일 오전 최종 검색에서 대화록 원본을 찾는데 결국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황진하 조명철, 민주당 박남춘 전해철 의원 등 열람위원 4명은 이날 오전 성남 국가기록원을 나흘째 방문해 최종 검색작업을 실시했으나 끝내 대화록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야가 NLL 포기취지 발언의 진실공방을 마무리짓자며 대화록 열람이라는 `극약처방`에 합의하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지만 당초의 논란을 불식시키기는커녕 대화록이 증발된 것을 발견하는 당황스런 국면으로 번지고 말았다.
당초 NLL 진실공방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NLL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데서 촉발됐다. 민주당은 `허위사실`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정 의원을 포함해 관련 발언을 한 의원들을 고발했으나 검찰은 지난 2월 이들 전원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민주당은 이에 반발해 항고했으나 검찰이 이를 기각하자 재항고를 포기하면서`NLL 공방`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6월 17일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NLL 포기 논란은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짠 시나리오”라고 주장했고, 이에 맞대응해 6월 20일 국회 정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은 국정원의 자료 열람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확인했다고 공개해 다시 불붙었다. 결국 민주당 문재인 의원은 6월 21일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과 녹취자료 등을 전면 공개할 것을 주장했다.
국정원은 사흘 뒤인 24일 2급 비밀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전문을 일반문서로 재분류한 뒤 전격 공개하면서 NLL 공방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그러나 국정원이 공개한 전문에는 노 전 대통령이 “나는 (김정일) 위원장님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NLL은 바뀌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이 담겨 있었을뿐 `NLL 포기`라는 직접적 언급은 없었다. 노 전 대통령 측과 민주당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회의록 열람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고, 대화록은 증발됐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60대와 대구·경북, 새누리당 지지층을 제외한 다른 계층에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는 새누리당과 국정원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야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어한 이유는 뭘까. 인위적인 `역사 들여다보기`가 될 대화록 열람은 분란만 자초할 뿐이다. 정치를 위한 정치는 신물나고, 비판을 위한 비판은 시끄럽기만 하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정치문화를 목도할 그 날은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