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문화재가 숭례문, 진흥왕순수비, 불국사의 다보탑이 생각난다. 보통 국보라고 하면 무게가 있고 규모가 큰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징비록이 국보 제132호 라고 하면 어떻게 책이 국보가 되었을까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로 지정된 것도 아주 보기 드문 경우라 말할 수 있다. 본래 징비록은 안동 유씨 가문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성룡이 남긴 문전과 자료들로 유성룡의 종손 가문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나중에 따로 국보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징비란 시경이라는 책의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 “미리 징계해 우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 따온 것인데 즉 우리가 겪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환란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가장 많이 떠올려지지만 임진왜란 전체를 기록한 징비록은 우리가 반드시 봐야할 중요한 책이며 과거의 문서이다. 징비록에는 우리가 전쟁초반에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가, 자국의 문제는 자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당시의 군사와 정치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해야 이렇듯 참혹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등 여러 문제에 대해 해법이 나와 있다. 이 책은 피난 가는 임금의 뒤를 따르는 조정 대신들과 궁녀들의 통곡하는 모습과 각 지방에서 벌어졌던 처참하고 참혹한 전투상황, 풍전등화인 나라의 운명을 바라보며 애썼던 저자인 유성룡이 마치 실제상황인 영화를 연상하게 할 만큼 생생하게 기록해뒀다.
유성룡은 지금부터 약 470년 전 1542년 경상도 의성현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견, 호는 서애, 시호는 문충이다. 문충의 뜻은 나라에 충성한 문신이라는 말이고 그만큼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의 아버지 유중영은 황해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였고 그의 형 유운룡은 원주부사(지금의 군수)를 지낸 명문가다. 1557년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공부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게 되지만 문하로 들어간지 7년 만에 스승 이황은 세상을 떠난다. 좀 더 많은 것을 스승에게 배우고 싶었지만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 이듬해 안동의 낙수라는 곳 서쪽언덕 밑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한 서당을 지으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 마음을 담아 서애를 자신의 호로 정한다. 성균관에 입교 후 1566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0년 우의정을 시작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삼정승 관직 모두 거친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형조정랑 이었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한다. 이들은 훗날 각각 해전과 행주산성에 승리를 이끌어 낸 역사적 인물이 된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의 뼈아픈 솔직한 고백이 하나 있다. 1583년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을 반대한 사실이다. 나중에 이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징비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전쟁 후 그 가치를 일본에서도 인정할 정도여서 1695년 교토의 야마토야라는 곳에서 책이 간행 할 정도였다. 그래서 1712년 기록을 보면 당시 왕이었던 숙종이 징비록이 일본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엄중히 금지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징비록을 쓰면서 유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했지만 임진왜란 후 또 다시 병자호란이란 큰 화를 입고 이후 일제에 의해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근대에 와서 남과 북의 대립속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북한과의 문제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여전히 크다 할 것이다.
호국의 달 6월이 됐다. 우리는 6월이 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넋을 기린다. 징비록은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전쟁의 아픔이 있는 6월에 간직해야 할 교훈이 있는 국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