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새로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서민적이고 소탈한 행보로 사람들에게 큰 호감을 주고 있다. 그의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현대 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들 특히 빈곤에 대한 문제, 자본주의의 폐단, 국가 간의 불균형 문제 등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티칸의 한 빈민 보호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야만적 자본주의는 이익만을 최우선시 하며 주는 것도 이득을 보기 위해서고 인간성을 배려하지 않고 착취하는 논리를 가르친다”라고 역설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소박한 행보와 세상의 불의에 대한 단호한 태도들은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종교를 초월해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숙고해보고 반성해야 될 문제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교황의 이러한 세상을 향한 직언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무엇이 교황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직언을 하게끔 하는가? 지난 5월18일 교황은 “오늘날 추위에 숨진 노숙자나 먹지 못해 굶는 아이들은 뉴스거리도 아니다”라며 “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이 찢어 진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향한 교황의 날카로운 직언 속에는 세상을 향한 부드러운 관심과 연민이 담겨져 있음을 느낀다.
관심과 연민, 현대 사회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인 것 같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들과 각종 부정부패와 끔찍한 범죄에 대한 소식들을 접한다. 당장은 애석해하고 분노하지만 우리는 쉽게 잊고 또 무감각해진다. 망각과 무관심 속에 우리 사회는, 아니 우리 자신은 더욱더 병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누군가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애석하게도 OECD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이다. 2010년에는 전체 사망원인 중 31.2%가 자살이었으며, 자살 사망자가 모두 1만5천566명으로 33분마다 1명이 자살로 생명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을 선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로움이 시달렸다고 한다. 누군가가 작은 관심을, 다시 말해 누군가가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아파했다면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는 부정부패와 비리 문제 때문이다. 신문 일면을 장식하지만 이내 우리의 관심 밖에서 사라져버린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윤리적인 결함이 있는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탐욕스러운 얼굴을 다시 들이미는 모습을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골치 아픈 일이니 아예 관심을 끄자!`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무관심은 더 큰 비리와 부정부패의 싹이 되고 있다.
관심과 연민이 필요한 시대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관심`이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란 뜻이고, `연민`은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관심과 연민은 마음을 두는 것이다. 달리 표현해본다면 관심과 연민은 서로에게 마음을 두는 것 그 이상으로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물처럼 서로 연결돼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관심과 연민이 없다면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더 삭막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관심과 연민만이 이 세상의 죄악과 부정부패를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임을,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한 밑거름임이라는 것을 함께 생각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