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이란 용어는 처음엔 단순한 익명의 표기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와 나`이면 어떻고 `A와 B`이면 어떻고 `사과와 오렌지`면 어떻고 심지어 `나와 너`이면 어떻단 말인가. 임의로 출발했을 그 용어가 우리 사회 밑바탕을 관장하는 계급의식으로 점차 왜곡·변질된 것에 씁쓸할 뿐이다.
우월적 지위와 아쉬운 입장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는 따지고 보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순간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 삶 자체는 갑을 관계의 총화이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여러 관계망에다 유교적 관습 및 상부하달식 기업문화 등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단 한시라도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가 `을`이라고 생각한단다.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우월적 입장이 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쉬운 입장이 되어 서운하고 갑갑한 일을 당하다 보면 피해의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자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부당함은 언제나 약자의 것인데다, 그 부당함의 배에 언젠가는 나도 탈 수 있다는 보험 심리 때문이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고 윈윈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회구조상 완벽하게 동급이 될 수 없다면 더 약자에게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진정성과 효율성이 담긴 인격 수양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에도 필요하다.
/김살로메(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