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을 지내고, 필리핀에서 유학하던 시절, 가장 친했던 멕시코 친구로부터 메일이 한통 왔다. 부활절을 기쁘게 보냈냐는 인사와 함께, 한국이 전쟁 중이라는데 피해는 없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더불어 나의 안전을 위해서, 한국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했다. 한국이 전쟁 중이라니….남과 북의 긴장 관계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나 보다.
자주 만나게 되는 다문화 가정의 결혼이주여성들과 이주 노동자들 역시 남과 북의 긴장관계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했다. 필리핀에서 온 어느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이 이처럼 위험한 나라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연일 계속되는 미사일 이야기, 핵전쟁이야기가 많이 불안하게 한 것 같았다. 이주 노동자를 한국에 많이 파견한 어느 나라에서는, 전시를 대비해 대사관에 거주지 신고를 하고, 비상연락망을 구축했다고도 한다.
`한반도의 평화`라는 말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 요즘은 시대의 과제요, 우리 모두의 소원이라는 `통일`도 부담스럽게 생각된다. 우리에게 `평화`와 `통일`이 불가능한 것인가. 모 방송사에서 2012년도에 통일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큰 부담만 없다면 통일이 되는 것이 좋다`(43.0%),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한다`(25.4%) 등 통일을 바라는 응답이 68.4%로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인식은 통일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북한이 남한의 어떤 상대라고 인식하는가에 대해서는 `경계 대상`(37.4%)이나 `적대 대상`(19.3%) 등 부정적인 응답이 56.7%로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해졌다. 소위 국민 대통합의 걸림돌이 됐던 것도 이런 이분법적 사고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우리의 모습, 좌우를 따지는 이념 논쟁,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지역감정 역시 이분법적 논리에서 시작된다. 이분법적인 논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전쟁의 상흔, 서로에게 준 상처, 불신, 오해 그리고 편견…. 마치 내성이 생긴 듯 우리는 어느 새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에게 준 아픔을 잊어버린 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불신과 오해 편견을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라는 말,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칭할 때도, `우리`나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부모님을 지칭할 때도,`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란 표현보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라는 말도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우리`와 다른 `타자`, `남`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사용하는 말이다. 가정 안에서도 자녀들은, 부모님 세대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들 역시도 자녀들을 두고 `우리` 세대와는 다르다고 한다.
유교 문화권에서 덕행으로 손꼽히는 `중용(中庸)`은 우리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앞에서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는 중용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까?
평화에 이르는 길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라는 말을 더욱 폭넓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역시도 `우리`민족이다. 다문화 가정, 이주 노동자, 새터민들 역시도 `우리`이웃이다. 세대 차가 나더라도, 서로 사고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르지만,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다양성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너`란 존재가 다양성안의 일치를 추구하기를 기대하기보다, `나`라는 존재가 먼저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바로 여기서 평화가 시작된다.
/ 이관홍 포항 죽도성당 부주임
다문화가정 가톨릭지원센터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