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숲` 권여선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96쪽
2010년에서 2012년에 걸쳐 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하지만 앞선 작품 `레가토`가 `학생운동`의 절정인 한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라면, 이번 소설집은 짧고 긴 인생들 사이에서 쌓고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잊지 못하리라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내지만 그 또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젊은 날 한 시기를 동거하며 매일같이 함께 생활한 친구와 그 속에 품은 자신의 치기와 과오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 왔음을 떠올릴 때, 우리가 인생이라는 망각의 힘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다. 이 작품집을 통해 우리는 실로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들을 성찰하고 삶이 품은 기억과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인 권여선의 해방과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