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벌리힐스의… ` 주하림 지음 창비 펴냄, 168쪽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주하림(27) 시인이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을 출간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경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톡톡 튀어오르는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돋보이는 색다른 시작법은 첫 시집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주하림이 논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꾸려놓은 감각의 세계를 목격하다보면 어느새 시인의 언어에 실려 이국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
낯설기에 강렬한 시인의 언어는 논리보다는 감각으로, 기억보다는 인상으로 진하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
“드디어 빛 없는 세계다/나는 눈곱을 붙였다 뗐다 하며 태어난다/간지럽냐고?/너의 마음은 반은 맞히고 반은 틀린 답이다/골방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틀에 한번 폐렴을 앓고/화분 속의 꽃들은 서서히 죽어가며 나의 안부를 묻는다/(…)/한밤중 과자 부스러기 속에서 콘돔 껍질 속에서/개미들은 전생에 벗어둔 옷을 꺼내 입고/문득 수많은 탄생들이 두려워진다/너는 입덧을 원했고/나는 적막에서 기괴하게 살다 간, 가난한 화가의 생애를 가리킨다”(`레오까디아와의 동거` 부분)
어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주하림의 시는 읽기에 “불편”하다.
“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 있지만”(황현산, 해설) 읽어가는 것만도 쉽지 않고, 시인의 의도라거나 시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시는 기존 문법이나 논리적 사고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대 배꼽에서 시든 입술을 줍”(`입실`)는다든가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고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레드 아이)는다는 기묘한 발상은 단숨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민한 감각을 열어놓는다면 시인이 이끄는 대로 그 호흡을 따라가며, “삶, 터전이란 것에 늘 시달려야 했”(`텍스처 무비`)던 화자가 들려주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미찌꼬의 호사가들`)의 “슬픈 귀엣말”(`네덜란드식 애인`) 같은 “위험한 고백”(`위험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마을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입이 세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개의 입을 달고,/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레드 아이`부분)
다소 생경한 시 제목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하림 시의 배경은 다분히 이국적이다. 카를 다리(체코), 말라부 해변, 프레그레소 항(멕시코), 북경, 상하이, 하얼빈(중국), 후꾸오까, 오끼나와(일본), 비벌리힐스(미국) 등 대륙을 넘나드는 시적 공간과 미도리, 미찌꼬, 깁슨, 애디, 루쏘, 이사벨, 후루미, 카와이, 채터턴, 소피 등 주로 외국 인명으로 등장하는 화자들은 마치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국적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인은 또한 일본 만화, 마니아용 영화, 서양의 고전소설 등의 한 대목을 인용하거나 소재로 삼는다. 다양한 장르의 인용에서 우리는 시인의 폭넓고 다채로운 문화적 섭렵과 남다른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일요일 아침, 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어린 애인의 품속에서/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만국기가 펄럭이는 술집에서 나라 이름 대기 게임을 하면/가난한 나라만 떠오르고//누군가 내 팔뚝을 만지작거릴 때 이상하게 그가 동지처럼 느껴져//자주 바뀌던 애인들의 변심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멀리 떼 지어 가는 철새들//눈부시게 흰 아침//이 세계가 나를 추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몬떼비데오 광장에서`전문)
“너처럼 아름다운 불면증 환자는 처음이다//뜨거운 새, 관념, 관념에 다가가는 자세/우리가 달아나려 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운명//사람들 귀에 새 부리를 걸어주었지만/처음 배운 날갯짓조차 하지 못하더군/간밤의 지긋지긋한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는 순간/우리 그림자는 섹스만 해서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창을 조금 열고 펑펑 쏟아지는 알약을 상상하다 깊은 잠이 들었다”(`빛의 볼륨`부분)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