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성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들끓는 세상을 목도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마음 쓰고 움직임이 죄 아님이 없는지라 혹은 선리(善利) 얻었으나 초심(初心)에서 물러가서 악한 인연 만나면 염념(念念)에 더 악해지니…” 지장보살본원경에 있는 글이다. 제 아무리 좋고 착한 일을 하고자 할지라도 악한 인연을 만나면 거기에 물들 수밖에 없어 결국 세상이 온통 죄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그것을 마치 무거운 돌을 어깨에 지고 진흙구덩이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치로 비유했다.
또 공자는 말한다. “심성이 고운 사람과 더불어 살면 그 방에 화사하게 핀 아름다운 난초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 향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방안에 가득한 것과 같고, 마음이 곱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 생선 썩는 비린내가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 비린내가 보이지는 않지만 내 몸에도 배어 있어 밖에 나가도 내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붉은 물감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 사람의 옷도 붉어지고, 검은 물감을 가슴에 품고 살면 그 사람의 옷도 검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앉을 자리와 어울릴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것이고, 또는 검은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붉은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어진다는 고사성어다.
요즈음 소위 `막장드라마`를 볼 기회가 종종 있다. 아침에 3편, 저녁에 1편의 줄거리와 캐릭터가 비슷비슷한 드라마를 보다 보니 빠지게 됐다. 혈연의 비밀, 아내와 남편 바꿈, 아이를 둘러싼 친자 쟁송은 기본이고, 유전자 검사가 얼마나 흔한 일인지…. 절대 선인, 절대 악인의 구별도 없다. 권선징악의 전형적 선인과 악인이 이들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고대소설과 사뭇 다르다. 이들 드라마에서는 선인을 돕는 하늘도 없고, 백마 탄 왕자도 없다. 선인은 악인에게 당한 원한을 악인의 방식 그대로 되돌려 복수하는 악인이 될 뿐이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서는 따뜻함 대신 차디찬 냉기만 가득하다. 행복한 사람도 하나 없다. 목이 터져라 고함치는 분노의 목소리, 분노의 눈초리, 분노의 행위가 화면을 뚫고 곧장 나올 기세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의 인물을 배운다. 그들의 분노를 배우고, 원한을 되돌려 주는 방식을 배운다. 말 그대로 나쁜 것을 가까이 해서 같이 나빠지는 경우다. 그럼에도 카타르시스, 대리만족이라 스스로 위무하는 교활함까지 배운다.
작년 호미곶 해맞이축전에 `액운타파`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1만 명을 위한 떡국솥에 불쏘시개를 넣으며, 한 해의 액운을 함께 태우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때 난 `탐진치(貪嗔恥)`석 자를 썼다. 내 안의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불살라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난 여전히 욕심 부리고, 분노하고, 어리석다. 특히 분노해 화나는 감정을 다스릴 역량이 없다. 오히려 드라마들을 보면서 분노를 배우고 있다. 올해도 난 또 `탐진치`를 액운타파의 불쏘시개 삼아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