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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딩

등록일 2012-12-21 00:10 게재일 2012-12-2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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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명시인
나는 종종 마음이 답답할 때 산을 올려다보곤 한다. 산의 정기와 산이 가진 변화와 풍경을 느끼며 마음에 힘을 얻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산을 바라다 보는 것을 지나 나를 알아채가는 과정이다. 산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산은 떨어져있는 듯하지만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산과 내가 동일한 지점에 이를 때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알아챈다. 내가 잘못돼 가는지 잘 돼 가는지를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뿌리 뽑혀 있는 것(uprootedness)`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본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다리의 떨림(불확실성, 염려)을 가지고 있다. 두 다리는 실제로 사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다리를 통해서 사람은 땅에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안하면 안절부절하고 일어서서 서성거리거나 앉아있더라도 가만히 발을 땅에 붙여놓고 있지 못한다. 그것은 매우 불안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한 자신을 알아채기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런 자신을 알아채고 심호흡을 하며 발을 땅에 붙이려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일, 그것을 우리는 접지(grounding)라고 하자.

예수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14:27)`고 말했다. 이것은 접지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죽음과 온갖 고통과 모욕행위 앞에서도 평안히 십자가를 지고 간 그이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평안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을 버리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희생이었기 때문에 접지의 차원을 넘어섰던 것이다.

다시 평안이란 단어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우리민족의 염원은 평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사를 `안녕`, `잘 지내`, `별 일 없지` 등으로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배부르고 등 따신 것, 호의 호식하는 것,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 이런 것이 소박한 우리네 소원인데, 그만큼 불안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고가 주변에 있다는 의식 때문에 가지고 있는 염려일 것이다. 이런 염려 속에서도 평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예수의 평안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면 그라운딩으로부터 시작할 일이다.

그라운딩을 하려면 다리를 어깨넓이 만큼 벌려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라. 내 마음의 의식을 발꿈치에서부터 그 주변을 알아챈다고 생각하라. 무릎, 허리, 가슴, 머리 그 위까지 다 알아채어라. 이런 과정만 해도 나는 땅에 접지된다. 접지된다는 것은 편안해지고 안정감을 되찾는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방해꾼도 나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나를 알아챈다`는 말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내 몸과 그 주변을 모두 의식 속으로 불러들이라는 뜻, 나의 존재에 대해 그 기반에 대해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떠올리라는 뜻일 것이다.

얼마 전, 아들이 모 대학의 수시전형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갔다. 그런데 면접을 보고 나온 아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완전 망쳤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내 마음엔 퍼뜩 후회가 지나갔다. `그라운딩을 알고 있으면서 가르치지 못했구나. 이 바보가 그걸 가르쳤어야지.`녀석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긴장하면서 갑자기 안정을 잃고 뿌리가 뽑혔던 것이다. 중요한 질문에 평정을 잃고 횡설수설하고 나니 면접관이 “네 논리가 틀렸다”라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아들은 중심을 더 잃고 홍당무가 됐다고 한다. 합격자 발표를 앞둔 일주일 동안 아들녀석은 그라운딩을 못하고 안절부절 이리뒤척 저리뒤척 뿌리내리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다행히 합격증을 받아 안정을 되찾기는 했지만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리 그라운딩을 가르쳤다면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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