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하던 탁상 달력이 어느새 달랑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가 뜻대로 되지 않은 아쉬움이 진하고, 보고 듣는 세상사가 한결같이 어두우니 해를 보내는 마음은 더욱 황량하다.
매년 이맘때면 거치는 통과 의례로 망년회(忘年會)를 찾는다. 요즘은 송년회로 순화해 부르지만, 여전히 망년회에 대한 의미가 더 친숙하다.
망(忘)은 `마음을 잊는다`는 글자이니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불쾌했던 일, 아픈 상처를 기억에서 지워버리자는 의미로 통한다.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도 담고 있으니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니 망년(忘年)해야 할 기억도 훨씬 많아졌다. 40~50대 남자들은 더욱 그렇다. 사회와 직장, 가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고된 여정을 지나왔다. 고된 심신을 누일 곳을 찾아 이러 저리 헤매지만, 세상의 굴레만 더욱 옥죄올 뿐이다.
40~50대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자란 마지막 세대들로 문화충돌에 따른 갈등고조속에 놓여있다. 어릴 때 집에서 최고 어른은 할아버지였고, 다음은 아버지였다. 집안의 의사결정권자로서의 절대적 권위자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며 효와 어른공경의 예절을 배웠다.
문화는 이성적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활동과 경험을 통해 이성과 감성에 길들어져 나타나는 생각이나 행동양식이다. 가부장적 가족문화에 길들어 있는 40~50대들의 몸과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반응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살림살이와 부모부양, 자녀교육 등 집안의 모든 의사결정권은 아내에게 넘어가 있다. 자녀 교육문제에 관한 한 완전히 아웃사이드맨이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연령별 이혼 사유에 관한 유머가 40~50대의 현재 처지를 잘 보여준다. 40대는 부인이 외출하는데 어디 가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보면, 50대는 부인이 외출하는 데 따라가겠다고 하면 각각 이혼 사유라고 비꼬았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뒷맛이 씁쓸하다.
사회적으로도 남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사냥과 농경사회에서 남자의 상징이었던 힘이 더이상 쓸모 없게 된 산업사회가 되면서 남자들은 여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우리나라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지난 2009년 이후 남성을 앞질렀다. 국가고시를 비롯한 각종 공개경쟁시험에서 여자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남자들이 여성CEO를 보필하는 일도 흔해졌고, 대통령 후보 TV토론회에 나온 3명의 후보 가운데 2명이 여성이다. 여성 후보자들의 날 선 공방전에 끼인 남자 후보의 주눅든 모습은 우리나라 남자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조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동료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좋은 무리에 끼이기 위해 숨돌릴 틈도 없이 아등바등했다. 고되고 힘든 세상사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망년회로 발길을 옮겨간다.
망년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자리다. 하루하루 만들어진 상처와 스트레스가 지워지지 않고 뇌의 기억장치에 차곡차곡 쌓인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히겠지만 당장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들은 술의 힘을 빌려 억지로 한 해의 기억을 지워보고자 의식적으로 술자리를 만든다. 그것이`망년회`이다. 망년회는 결국 과음으로 끝이 나게 마련이다. 폭음으로 기억을 일시적으로 지울 수 있는 효과는 있지만, 다음날 술이 깨고 나면 엄청난 후유증을 동반한다. 숙취의 고통과 음주 추태에 따른 후회 등 스트레스만 더욱 쌓이고 건강만 해칠 뿐이다. 망년회도 세상의 탈출구가 되지는 않는다. 이젠 그만 음주 망년(忘年)의 착각에서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