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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천천히 달리기

등록일 2012-11-23 21:53 게재일 2012-11-23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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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명 시인

10여년 전 교내 체육대회에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란 종목이 있었다. 그 종목에 내리 3년 우승한 게 K군이었다. 나중에 담임교사에게 들어보니 그는 입학 후 부적응학생으로 무기력하며,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1년에 1번 열리는 교내 체육대회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를 기다리며 지루하고 힘겨웠을 야간자율학습과 수업시간들을 견뎠다는 이야기다. 그 녀석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는 우습기도 했지만 진실해서 마음에 담아뒀다. 그가 졸업해서 어떤 삶을 사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갈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 그래서 어떤 곳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고 즐거운 것을 찾아서 그것으로 어려움을 지우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는 세상의 바쁘고 분주하게 쫓아가는 삶을 조롱하는 종목이다. 무엇보다도 빠르게 달리도록 설계된 기계를 가지고 천천히 달리라니 역설이다.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참 좋은 종목이었는데….

K는 누구보다 느린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으로 읽혔지만 속에는 빛나는 알곡들을 채우고 있었던 기쁨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철학과 깊이는 천천히 가는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말이다. 나는 오늘도 천천히 가려고 하는 아이들 틈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오히려 그들의 편에 서서 핑핑 돌아가는 세상을 비웃고 싶다. `좀 천천히 가면 어때! 거기 진리가 있을지 모르잖아!`라고 위로해주면서….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알바니 프리스쿨에 제시라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학생이 전학왔다. 제시의 어머니는 마약중독자였다. 일곱 살에 형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죽었다. 사실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삼촌 역시 프리스쿨에 다니는 동안 죽었다. 제시는 충동적이고, 공격적이며, 우울과 슬픔, 고통, 불안, 분노 등을 늘 주변에 표출하는 아이였다. 프리스쿨은 제시에게 `일 년 정도 아무런 학습활동 없이 지낼 수 있다. 학교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는 지침을 줬다. 학습시간표와 끊임없는 평가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동 감시로부터 해방된 제시는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마음대로 하는 아이가 되는 듯했지만 점차 주변학생들의 제지로 스스로 훌륭한 학생이 돼 간다. 제시는 품행이 나아지기 시작했으며, 불규칙하게 참석하던 수업에 흥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제시에게 학교수업에 참가해야하는 절실한 의미가 생겨났고, 결국 짧은 시간안에 그동안 뒤처져있던 학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어떤 학교가 학생을 두고 `어떤 수업도 할 필요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학력이 뒤처진 학생의 부모에게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이 학습에 스스로 투자할 마음을 먹기만 하면 언제든지 학습 진도를 따라가는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학교가 얼마나 될까. 그저 자전거 천천히 타기의 우승자였던 K군처럼 학생 스스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은 학교 스스로 교육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미 학교는 이보다 더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학생들의 등교거부와 학교폭력, 상시로 욕지거리를 하는 부정적 언어문화, 자살·불안·분노에 사로잡힌 신경증에 걸린 아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의 프리스쿨은 `자전거 천천히 달리기`와 같은 철학을 가진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경쟁사회에서 오히려 거꾸로 편하게 내려놓기를 권유하는 학교이니 말이다. 이런 철학이 바탕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 교육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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