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는 중에 간혹 스스로에게나 또는 이웃에게 잘못을 저질러 버릴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자책감과 죄책감, 자괴감, 수치심 등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혹하게 자기를 정죄하기도 한다. 그는 이것을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여긴다.
세상에서 가장 학대받고 천대를 당하면서도 용서마저 받지 못하는 자가 곧,나 자신이 아닌가. 또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감옥에 가두어 버린 자가 혹시 나 스스로가 아닌가. 나에게 가장 대우를 받지 못하는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지극히 약하고 작은 사람 속에 바로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다면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마음속을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게 하고, 자존감을 낮추어 버리며, 자기를 학대하거나 비하시켜 버린다. 부정적인 내용을 강화해 버린다.
어린 아이에서 청소년일 때까지 우리는 하루에 수십 회 동안 부모로부터 부정적인 말을 듣는다고 어느 학자는 말했다. 그 말들에는 이런 것이 있다. `가만히 있어! 조용해! 안 돼! 수준이 그 또래 정도구나! 또 그랬구나! 아이구 더러워! 이 바보야! 이놈의 원수! 누구 닮아 이 모양이냐! 이걸 점수라고 받아왔나! 한 번만 더 이러면 너를 호적에서 파 버린다! 내 뱃속에서부터 괴롭히더니! 왜 이리 못났는가! 우리 집 이렇게 된 것은 너 때문이야!` 등의 말로 자식을 정신적으로 조여 줘 버린다.
부정적인 말은 가슴에 상처를 안겨 준다. 인두로 지져서 낙인시켜 준다. 내가 옷을 사 입었을 때 4명이 `옷이 좋다`고 하더라도 1명이 좋지 않다고 하면 1명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부정적인 말을 듣고 생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회복하려 하면 적어도 4명의 긍정적(축복의)인 말을 들어야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면 사랑, 기쁨 등의 말은 들리지 않고 아득히 멀어져 버린다.
세상에서 소문난 인물들은 모두 엄청난 부정적인, 이런 것을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들이다.
예를들어 가롯 유다는 예수가 있는 곳을 경찰에게 알리고 돈을 받았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 뒤의 풀이가 서로 상반된다. 유다는 잘못을 이해하고 돈을 버렸으나 자기를 학대하고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통곡으로 잘못을 깨우치고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자기를 학대하지 않았다.
자기 사랑은 자기를 용서하고 긍정하여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된 행위는 그 자체일 뿐 인생 전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행동과 자기를 구분해야 한다. 자기중심주의, 자만심, 우월감, 도취, 이기주의에서는 자기사랑이 자랄 수 없다. 특히 이기주의자란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의 과거에 있었던 약점, 지난날의 아팠던, 잘못된 경험 등은 나의 정신력의 성장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빙긋이 웃으면서 받아들여라. 그러면 약점을 사랑할 수 있다.
약점이야 말로 정신적인 성장을 위한 좋은 거름이 된다. 신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 위대한 일을 계획한다. 이제 거울 앞에 서서, 앞에 보이는 나에게, “너, 미안해. 나는 너를 용서한다. 너도 나를 용서하라”고 이야기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