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권의 반 서방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유대인들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동영상을 제작·유포한데 이어 프랑스 시사주간지 `샤틀리 엠도`가 무함마드를 그린 만화를 실었기 때문이다. 시위를 촉발한 동영상에는 무함마드가 늘 술에 취해 있고, 돼지고기를 먹고, 여색을 탐하며, 도둑질을 일삼는 것으로 나온다. 만화의 만평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배타성은 종교의 본질적 부분의 하나다. 우리가 21세기의 불길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문명의 충돌`을 거론할 때 그 문명의 충돌이란 본질적으로 종교들 사이의 충돌이다. 다시 말해 충돌의 커다란 주체들이 흔히 예견되듯 서방과 아랍이라면 그 충돌이란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이다. 이슬람권의 많은 사회에서는 아직도 정교 분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화정을 택하고 있는 이란 같은 나라가 역설적으로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완고한 신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세속의 일이 흔히 종교에 포섭돼 있다.
이슬람 국가들이나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에 비해서 종교로부터 더 독립적으로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종교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세속의 일에 간섭하고 있다. 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수입된 종교들이 한국에서는 기묘하게도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돼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또는 그 종교 내부에서 심하게 충돌한다. 단군상의 목이 잘리거나 불상이 훼손되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특정한 교파나 그 교파 지도자의 부패나 여타의 일탈행위를 보도하는 언론기관은 흔히 신도들의 물리적 공격 목표가 된다.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종말론은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일부 이단 종파들의 종교적 일탈일 뿐 정통교파의 종교라는 것은 본디 거룩하고 너그러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독교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역사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신·구교간의 전쟁은 기독교의 역사의 수많은 피흘림 가운데 두드러진 예일 뿐이다.
종교는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종교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으면 그 반응이 민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폐쇄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종교 시대에 살고 있다. 바이블벨트에 있는 휴스턴에도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이슬람의 나라 파키스탄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다. 보스턴에도 캄보디아 불교가 있고, 모스크바에도 힌두교인, 런던에도 시크교인이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심지어 가족 구성원간에도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다종교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공존의 원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공존의 원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참 진리라고 확신한 나머지 남의 종교를 폄하하거나 멸시한다면 공존의 원리가 깨어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마련이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 종교 간의 우열을 논한다든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만이 참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미신이란 주장은 갈등만 조장할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