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재 시집 `얼룩의 탄생` 문학과 지성사 펴냄 김선재 지음, 152쪽
“지금은 오래된 얼룩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
모든 얼룩이 평등해지는 시간
얼룩을 덮은 얼룩이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
저녁의 새들이 물고 온 종이에 그려진 종이 혼자 우는 시간
하루를 지나온 숲은 서늘한 입김으로 어제보다 조금 더 늙어
늙어서 기쁜 시간으로
시간의 끝으로 달려간 어느 날,
슬프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 별의 모든 사잇길이 걸어갑니다”
-`저녁 숲의 고백`부분
얼룩은 본바탕에 의도하지 않게 생긴 다른 빛깔의 자국이다. 얼룩이 드러나는 것은 현재지만, 실은 현재의 사태가 아닌 과거로부터의 흔적인 것이다. 살아오면서 생긴 과거의 상처들이 기억 속에 자흔처럼 남아 그것들이 서로 덮이고 뭉쳐져 현재 속에 새로운 양태로 돋아나듯이 얼룩은 현재에도 과거에도 속하지 않은 고유한 시간성을 가지며 언제로부터의 얼룩인가를 떠나 평등해진다.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
통증을 용서해요 나를 잊어요”
-`가시를 위하여` 부분
사랑과 이별의 전 과정은 꿈처럼 모든 것이 모호하고, 상처를 내는 주체와 상처받는 객체가 구분될 수 없다. 혀와 바늘과 미각과 온도가 지배하는 그 통증의 세계 속에서 감각의 주체는 서로 뒤섞여버리고, 온전한 전체의 몸이 없는 것들은 “피 흘리지 않고 아”프며 “찾는 순간 서로를 지울” 수밖에 없다. 시간을 견뎌서 잊을 수 있길 기다릴뿐.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