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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2-17 22:09 게재일 2012-02-1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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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삶과 자연정갈한 시적 찬가
전통적 서정과 강원도의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두고 시대현실과 기울어가는 농촌공동체의 아픔과 슬픔을 담백한 어조로 노래해온 이상국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창비)가 출간됐다.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들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나온 삶을 노래하는 이상국의 시는 애잔한 감정을 자아낸다.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한”(`그늘`) 삶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했던 시인의 꿈은 심상한 좌절을 맞는다.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먼 배후`)이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상강(霜降)`)다는 자조에 이르는 데서는 짐짓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인은 마냥 서러움에 주저앉지 않고 “매일 얼어붙은 강을 내다보며”(`언 강을 내다보며`) 아직 누군가를 기다린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산그늘` 전문)

이상국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나 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바다`보다는 주로 `땅`을 소재로 삼고 `흙`의 언어를 부리는 농경적 정서에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혜화역 4번 출구`)임을 자임하며, “붉은 메밀 대궁”에서 “흙의 피”를 떠올리고 “달밤에 깨를 터는”(`옥상의 가을`) 어머니를 연상하는 전형적인 농사꾼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국수(`국수 공양``폭설`), 장떡(`뿔을 적시며`), 라면(`라면 먹는 저녁`), 감자밥(`감자밥`), 모두부(`참 쓸쓸한 봄날`), 닭백숙(`조껍데기술을 마시다`) 등 음식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다.

이러한 시편들은 우리 시사(詩史)에서 음식을 시의 소재로 즐겨 삼은 대표적 시인인 백석의 아취(雅趣)를 물씬 풍긴다. 1999년 시인이 수상했던 제1회 백석문학상의 영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시인은 불교 용어 `공양`을 통해 먹는 일의 성스러움과 음식의 귀함을 새삼 환기한다. 그는 이천원짜리 국수 한그릇에서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국수 공양`) 기운을 얻고, 인간세의 도반의식을 깨친다.

모진 세상살이의 정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도 그러하거니와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관조하는 시인의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다. 물떼새가 해안선을 따라가며 외다리로 종종걸음 치는 모습이 “마치 지구가 새 한마리를 업고 가는 것 같았다”(`다리를 위한 변명`)는 구절이나, “나뭇가지에 몸을 찢기며 떠오른 달”(`한천(寒天)`), 겨울날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시뻘건 손”(`매화 생각`),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소나무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함성처럼 흔들린다”(`소나무숲에는`)와 같은 시구(詩句)에서 보듯 시인의 섬세한 손끝에서 가슴 시린 절경이 고요히 태어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창비 펴냄, 120쪽, 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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