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창비 펴냄, 황정은 지음, 232쪽, 1만1천원
2010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큰 주목과 기대를 모으고 있는 소설가 황정은(36)의 두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이 출간됐다.
시적인 압축이 돋보이는 간결한 언어운용의 미덕이 완성도를 더했고, 폭력적인 세계를 간신히 살아내는 인물들을 감싸안는 소설적 윤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문학에 대한 고민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단단히 맞물려 응축된 신작이다.
한국문학에서 황정은은 지금 평단과 독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젊은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결합으로 그 개성을 인정받았고, 첫 장편 `百의 그림자`로 단숨에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고도의 윤리성을 바탕으로 새롭고도 완성도 높은 소설미학을 구축했다`는 고평을 받았다. 그의 발표작들은 사회정치적 관심과 소설적 미학이 성공적으로 합치된 사례로 즐겨 거론되며, 편편이 소재와 소설적 관심에서 다양하고 의미 깊은 변화를 보이며 눈 밝은 독자들을 사로잡아왔다. 그런 9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 `파씨의 입문`은 그가 받는 주목이 합당함을, 나아가 그가 2010년대 한국소설을 이끌어갈 유력한 작가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는 평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소설은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와 함축적인 대화가 먼저 눈길을 끈다. 한밤에 벌어지는 친지들 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집의 첫 단편 `야행(夜行)`부터 그렇다. 소설은 정황에 대한 구구한 설명 없이 간결한 행동 묘사와 생생한 대화만으로,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을 낯설고 강한 여운을 남기는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 만들어낸다. 그뿐 아니라 모든 소설이 그렇다. 무심한 듯 능청스러운 듯, 간결하고 리듬감있게 흐르는 문장과 대화에 압축된 단단한 긴장감이야말로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
환상이나 기괴한 존재 없이 생활에 밀착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도 각별하다. `양산 펴기`는 일일 바자회에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에 나선 주인공의 하루를 그린다. 순정하고 선한 황정은 소설의 인물이 마주하는 생활전선의 현장이 담백하고 생생하게 묘사되고, 어느덧 바자회 장소 건너편에 시위 인파가 등장해 양측의 소리가 겹쳐 울리는 장면에 이르러, 별안간 현실의 부조리가 낯선 모습으로 드러나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비애를 자아낸다.
현실에 밀착한 또다른 작품 `디디의 우산`의 주인공 디디는 어렸을 때 도도의 우산을 빌려 쓰고 되돌려주지 못한 일을 오랫동안 마음의 빚으로 담아두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도도에게 자기 우산을 빌려준다. 주인공은 그 일을 계기로 도도와 함께 생활하게 되고, 비슷비슷하게 팍팍한 현실에 짓눌려 살아가는 동기생 친구들과 어울린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무력하지만 선량한 이들이 함께 모여 웃는 장면은 서글픈 가운데서도 드물게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장면이다.
그 위로와 연대의 바탕에는 “모두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들에게 나눠줄 우산을 찾아 신발장을 열어보는 주인공의 마음이 있다. 황정은 소설의 온기는 그렇게 표나지 않게, 그러나 어디에나 드러나 있다. 항아리의 말을 끝내 무시하지 않고 나침반을 들고 서쪽을 찾아가는 `옹기전`의 주인공이 그렇고, 치욕을 감내하고 있는 노인의 발치에서 묘, 하고 우는 `묘씨생`의 고양이가 그러하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팻말을 걸고 선 시위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양산 펴기`의 화자 역시 그렇다.
이처럼 작가는 간신히, 겨우 존재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차분히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사려 깊게 말을 고르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언어로 완성해나간다. 그의 맑고 단단한 언어는 그 고집스러울 만큼 사려 깊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실린 표제작 `파씨의 입문`은 결국 이 모든 것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씨는 파씨일 뿐, 파씨로서 발생하고 부단히 파씨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하는 주인공 파씨 혹은 작가, 언어 혹은 소설의 시작에 관한 인상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가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파씨의 입문`이란 제목은 그러므로 황정은이라는 이름의 소설세계의 선언이기도 하고 그 세계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