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터키의 근현대 역사 3代 100년의 이야기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01-06 20:00 게재일 2012-01-06 11면
스크랩버튼

`고요한 집` 민음사 펴냄,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번역, 280쪽, 1만2천원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60)의 장편소설`고요한 집(Sessiz Ev)`(전 2권, 민음사)이 출간됐다. 이 소설은 파묵이 발표한 두 번째 소설(1983년)로 그 스스로 “내 젊은 날의 영혼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스탄불 근교 소도시에 살고 있는 아흔 살 된 할머니의 집에서 세 남매가 보낸 일주일을 그린 이 작품은 터키에서 `마다라르 소설상`, 프랑스에서 `유럽 발견상`을 수상하면서 파묵이 처음으로 전 세계 문학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첫 소설`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토마스 만을 연상케 하는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을 보였다면, 이 소설은 포크너나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모더니즘적 서술을 보여 준다. 다섯 명의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다층적 서술 방식`이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할머니의 회상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 수법 등 파묵 문학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역사의 의미를 회의하는 역사학자,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혁명주의자 여대생,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고등학생, 약 한 세기 동안 급변해 온 터키 역사를 목격한 할머니, 그녀와 40년 동안 기묘한 동거를 해 온 하인, 급진적 민족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려 하는 십대 소년을 통해, 터키 근현대 약 100년간의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와 그 속에서 개인들이 겪게 된 비극을 파묵만의 스타일로 풀어냈다.

오르한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로 `밀리예트`신문 소설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1985년 발표한`하얀 성`으로는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사이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 바로`고요한 집`이다.`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소설이었다면, `고요한 집`은 다층적 서술 기법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 등을 사용해 그의 문학 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이 소설은 파묵 특유의 문학이 무르익는`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단초를 보이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1980년 9월에 터키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데, 이 소설은 그 두 달 전인 7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작품 전체에 정치적 긴장감이 깔려 있다. 또한 전체 32장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해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표현되고, 지식인에서부터 하인, 90여 년 전과 현재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 다섯 명의 화자는 아흔이 된 할머니 파트마, 그녀의 두 손자 파룩과 메틴, 하인 레젭, 레젭의 조카 하산이다. 이들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터키의 정치, 사회, 문화가 변화해 온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된다.

바랜 종이 더미를 읽어 나갈수록 그런 기분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한다. 긴 항해를 하다가, 항해 내내 당신을 답답하게 했던 안개가 걷히고, 나무와 돌, 새 들을 품은 육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감탄하듯, 읽어 갈수록 펼쳐지는 종이들 사이에 서로 맞물려 있는 수백 만 개의 삶과 이야기가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다.

파묵은 `고요한 집`에서 약 100년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트마와 셀라하틴, 도안과 레젭, 세 손주들과 하산이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셀라하틴은 루소나 볼테르 등 서양 철학자들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맹목적인 서양 추종자였으며, 파트마는 남편의 뜻을 묵묵히 따르기는 하지만 “나는 동양에서 나온 첫 번째 서양인이야, 서양이 된 첫 번째 동양!”이라고 하는 그의 사상과 행동은 이해하지 않고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서양에 비해 발전하지 못한 동양을 구제하려 하는데, 이를 위해서 그는 40년 가까이 백과사전을 집필한다. 그러나 이 기획은 완성되지 못하고, 그는 동양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실행하지는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오히려 하녀에게서 두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내와 아들에게 평생 자기 대신 짊어져야 할 짐을 남기고 떠난다. 파트마는 이러한 남편 옆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더욱 냉담해지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문화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