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 암울한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최루탄 산발하던 시간 속”(`즐거운 추억`)으로 달려왔던 시인은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고 “유일하게 평화로 남은/유년의 시간”(`나무들은 반듯하다`)을 거슬러 올라간다.“씀바귀 같던 그 시절”(`오누이`), “식민지 하늘, 어두운 들판”에서 “저당잡힌 생”(`가을 내소사에서 아버지를 보았다`)을 살았던 아버지와, “우물 속으로/무심한 별들이 쏟아지던 밤” “교복이 입고 싶”어 흐느끼던 누님과, 누님의 “얇게 여윈 잔등 쓸어주며/목젖 아래로 우시던”(`누님의 우물`) 어머니가 아련한 추억 속에서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위로받고 싶은 슬픔이 너무 컸”(`회기동 한 시절`)던 시절, “산에 간 큰성/살릴라고 십삼년간/감악소 담벼락에” “몇동이나 되는”(`다시, 어머니가 쓴 시`) 눈물을 뿌렸던 어머니는 특히나 시인에게 특별한 존재로 되살아난다. 통한의 세월을 살면서도 “죽음에 맞불을 놓으”며 “생의 품격”을 잃지 않고 “기품이 넘치던”(`시간처럼 무거운 물건 보지 못했네`) 어머니의 삶은 “거친 발길에 제 몸 맡”기며 “밟히면서 강해”(`차전초`)지는 민중의 삶, 그 자체이다.
상처로 얼룩진 쓰라린 시대를 견뎌온 `어머니`의 기품을 가슴에 새기며 가파른 삶의 현장을 숨가쁘게 달려온 시인은 이제 “섣부르게 이기려는 흉내 내면서”(`마흔`) “백미터 달리기로 살아온 세월”(`나무들은 반듯하다`)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이제 겨우 용서를 말”하는 “쓸쓸한 후회”와 “한없이 나약했”던 “죄책감”을 “돌릴 수 없는 나이테 앞에서 고백”(`이제 용서를 말하겠네`)하면서, “몸속 어디쯤에 숨겨둔 눈물”(`겁에 질린, 취하지 못하는`)을 터뜨려 “근심/가득한 몸”으로 운다.
몸이 운다/아프다고, 슬프다고/고함지른다/마음보다 먼저 울어버린다//근심/가득한 몸//더이상/상처를 안고는 살 수 없다고/오늘밤/조용히 관절 일으켜세우고/울어댄다(`몸에 대하여`전문)
그러나 지난 세월에 회한만 남는 것은 아니다. “누구 앞에 선다는 것은/배우는 일이라는 걸”(`즐거운 추억`) 깨달은 시인은 “뻔히 질 줄 알면서/앞질러 달리던 시절”(`그대, 다시 박수 받지 못하리`)을 새삼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던져/누군가의/생을 거룩하게 하고//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을/가슴에 품어/희망을 이어간 사람들”(`겨울 등고선`)을 위하여 “정직한 슬픔의 노래”(고명섭, 해설)를 부른다.
비우지 않고/소리 채울 수 없다지만/버리지 않고/크게 울 수 없다지만//나, 저무는 5월/미처 채우지 못한/노랠 불러야겠네//다들 이제 끝났다고/발길 돌릴 때/혼자 기어코 울어버린 사내를 위해/노랠 불러야겠네/저 넘쳐나는 눈물 불러온 경계 위에서/오늘, 기어코 노랠 불러야겠네//너를 위해/처음부터 비우고/나를 위해 마지막까지 울어버린/한 사내를 위해//기다리다 홀로/노래가 되어버린 사내를 위해/차마 소리가 되지 않는 노랠 불러야겠네(`노래` 부분)
시인은 이번 시집을 펴내며 “시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킨 시간이 멀고 무겁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하지만 “삶의 현장의 부름에 응답하느라 시를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는 시인이었”고, “저 세월 몰래 쓴 시들”이 보여주듯이 “날마다 시인으로 사는 시인이었다.”(해설) 그는 여전히 “빈집에/홀로 피어/발길 붙드는 꽃들”(`빈집`)에게서 애정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고, “하찮게 보이는 것에”도 “희망을 품는”(`큐레이터는 혼자였네`) 다감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시대의 부름에 따르느라 오랜 시간 침묵했던 한 서정시인을 다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창비 펴냄, 고광헌 지음, 124쪽, 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