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판단이 손익에 결정적
구룡포항의 아침은 어종 부문별로 나누어진 세 군데 수산물 공판장이 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징어잡이 트롤선이 전용으로 드는 판장과 문어나 대게 등 잡어가 드는 판장은 7시, 오징어 활어와 선어가 드는 판장은 6시에 입찰을 보기 때문이다. 약간의 악조건에도 조업을 떠났던 `백경호`가 물살 가르며 입항한다. 저마다 고유 번호가 적힌 모자를 쓴 중매인들이 `백경호`로 모여든다. 선원들은 일정한 양의 오징어를 뭍에 올려 쏟아놓는다. 중매인들은 먼저 크기나 상태 등을 확인한 다음 다시 경매대로 돌아와 빙 둘러 선다. 그리고 경매사가 종소리로 입찰 시작을 알리면 저마다 책정한 값과 주문할 양을 적는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척척 손발이 맞는 움직임이다. 구룡포에서 태어나 공판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35번 중매인 황보 관현(52)씨, 구룡포수협 중매인조합장을 맡고 있는 그가 거기에 있다.
“무조건 네 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가끔 이웃들과 늦게까지 어울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두 시에 들어가도 네 시, 세 시에 들어가도 네 시, 이건 무조건입니다. 기상이 안 좋은 날이라고 해서 쉬는 날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잡아 온 것을 그날 다 풀었지만 요즘은 배에서 저장했다가 선주들이 물량을 조절해 풀기도 하거든요.”
그는 요즘이 가장 바쁜 계절이다. 추석을 지나 구정까지가 오징어 성어 기간이기 때문에 내년 사업 물량까지 모두 확보해야 한다. 수산물 중매인은 바다의 룰에 맞춰 살아가는 직업이다. 출근하기 전에 시세와 정보를 수집하고 배와도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공산품과 달리 일정한 물동량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날마다 긴장이다.
“배가 들어오면 생산자가 수협에 위탁을 합니다. 수협에서는 경매사를 파견하고 지정 중매인들을 대상으로 경매를 하지요. 중매인들은 물건의 선도를 보고 어떻게 사서 어떻게 팔아야겠다를 결정하고 또 이 물건이 어느 지역에서 강세인지 빠르게 가늠해야 해요. 어찌 보면 그 시간이 중매인들에게는 삶의 전쟁터인 셈입니다. 경쟁을 해서 낙찰을 받아야 하니까요. 다른 중매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순간의 판단이 연계된 거래처의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니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찰이 끝나면 곧바로 백화점이나 재래시장에 보내기도 하고 위탁 창고에 보관 했다가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손해요? 물론 손해 볼 때도 있지요.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가 처음 공판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78년, 스무 살 때였다. 구룡포에선 꿈이 두 가지다. 하나는 선주요. 하나는 상인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양조장과 주산학원 등 상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탓인지 그는 상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도 배는 한 번 나가면 1억 2억을 벌고 중매인은 하루에 20만원, 30만원을 벌어도 장사를 잘 해서 큰 상인의 길을 가고 싶다고 한다. 상고를 졸업할 당시 옆집에 항만 공사에 기사로 온 김두현씨가 있었는데 모친은 그에게 취직을 부탁했고 그때부터 항만 공사에 보조 역할을 시작했다. 얼마 전 과메기문화거리로 만들어진 공원, 그곳을 매립할 때 였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술배달을 했는걸요. 집이 양조장을 했는데 아버지께서 잡기에도 능하셨지만 장기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화장실도 안가고 다섯, 여섯 시간을 내리 두셨지요. 주문이 오면 배달은 가야하는데 장기도 둬야하고 결국 `현아, 니가 좀 갖다 오너라` 이렇게 되었지요. 안갈 수도 없고 해서 가면 어른들한테 귀여움도 받고 기특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거 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으쓱해서 더 하려고 하지요. 술을 말통에 받을 때 세게 촤악 내리면 거품이 많아서 7홉이 될 수도 있고 8홉이 될 수도 있는데 칭찬을 해주는 집 술은 살살 따루게 되요. 배달도 빨리 갖다 주고 싶고 말이지요.”
부지런한 천성이 먼저인지 주변의 칭찬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어릴 때부터 일은 무섭지 않았다. 항만공사 보조 역할을 시작으로 당시 중매인 조합장이었던 박삼만씨와의 인연이 닿았다. 교련복 바지를 입고 부지런히 오가는 어린 청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운영하던 삼흥기업은 수산업을 크게 했다. 어선도 제일 많이 갖고 있었고 보망 창고도 있었으며 쌀가게와 낚시점도 운영했다. 임시 직원으로 발탁 되어 공판장 일을 했다. 일이 끝나면 오징어 건조도 하고 꽁치 잡는 그물에 납을 다는 보망 작업도 했다. 뿐만 아니라 뱃일도 봐주고 가게도 봐주고 쌀도 사러 가곤 했다. 꽁치가 많이 잡혀오면 그물을 항 안에 들여와 털었는데 그도 함께 털었다. 당시 월급이 4만 5천원이었는데 박삼만씨는 5만원이나 되는 용돈을 주기도 했다. 아버지와 갑장이었던 그는 늘 “현아, 현아” 부르며 정을 나눠 주었다. 신이 나서 일을 찾아 했던 삼흥기업 시절은 많은 업종과 사람들을 공부할 수 있었던 훌륭한 학교였다.
3년 후,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매형의 회사로 옮겨야만 했다. 마치 은혜를 배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2003년, `동우물산`이라는 이름을 걸고 창업을 했다. 공판장을 들락거린 지 25년 만에 본격적으로 중매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경매가 끝나자 판장은 또 한 번 출렁인다. 레일을 타고 오른 오징어들이 트럭에 실려 나간다. 선원들의 호쾌한 목청이 드높다. 어느새 한껏 솟아 오른 해가 젖은 포구를 말리고 있다. 지난밤 건져 올린 바다의 값을 매기고 돌아 나가는 그의 어깨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권선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