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같이 포항시역이 확장되기 전 포항은 영일군의 한 면이거나 읍이었다.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해 통제에 유리하게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당시 현재의 포항시가지는 `포항면`이었던 것이다. 1933년 `포항읍`으로 승격하고도 포항시가지는 여전히 영일군의 한 산하 단위였다.
그러나 그럴 때도 포항면 포항읍은 영일군의 중심지였음에 틀림없다. 영일군의 여러 읍·면이 포항면 포항읍을 축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포항면 포항읍에서 일어나는 일이 영일군 전체에 기준이 됐다는 뜻이다.
포항의 영흥초등학교는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존재다.
옛 포항면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개신교회에서 싹을 틔웠다.
지금도 대단한 포항 개신교세의 앞날을 그때 벌써 이 학교가 예시하기 시작했다고 봐 과언이 아니다.
학교 이름이 `포항학교`가 아니라 `영흥학교`가 된 데도 그런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연유로 영흥학교는 당시 포항면의 3.1운동 모체가 됐다. 인접 다른 면으로 운동이 퍼져나갈 때의 진원지도 포항면이었고 포항영흥학교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해 온 포항영흥초교도 오는 11월1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그러다보니 영흥초교의 지난 100년을 보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는 일이고, 경북 동해안의 근대사를 보는 일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자료들에 따르면 영흥초교는 1911년 11월1일 예수교장로회 포항교회가 중심이 돼 문을 열었다.
교회당을 그대로 교실로 쓰고 신자들이 교장 교감 교사 일을 나눠 맡았다.
처음엔 아동 10여 명을 모아 갑반·을반 2개로 편성해 국문, 한문, 산술, 성경, 찬송가 등을 가르쳤다. 2년 뒤인 1913년 3월28일에는 `사립 영흥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보통과 4년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역사를 쌓아가던 영흥학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포항지역의 중심체로 역할하기에 이른다. `포항시사`(2010년)에 따르면 경북의 3·1운동은 대구(3월8일)에서 먼저 터진 후 3월11일 포항면으로 퍼졌다. 거기서 이틀간 계속되다가 이후 3월22일 청하면 송라면으로 확산됐다.
그럴 때 포항면 만세운동의 중심에 선 것이 영흥학교 교사들과 이 학교가 바탕한 기독교인들이었다. 모두가 영흥학교에 민족적 성향이 짙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영흥학교가 1911년 10월 공포된 일제의 `사립학교령`에 따라 탄압을 당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만세운동까지 주도하게 되자 학교의 고초는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폐교 상황까지 갔던 영흥학교는 1936년 3월 김용주라는 분에게 인수됐다. 한나라당 전 원내대표 김무성 의원의 아버지라 했다. 김용주씨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못하는 조선 학생들을 위해 학교 인수를 결심했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사 직전이던 영흥학교는 목숨을 부지했다. 경영자가 바뀐 영흥학교는 다음해 교실로 쓰던 포회교회를 떠나 별도의 건물을 마련했다.
1945년 나라가 광복하자 모든 게 바뀌었다. 영흥학교도 1946년 사립에서 공립으로 변경됐다. 김용주씨는 학교 재산 일체를 영일군청에 기부채납했다. 이름 또한 영흥국민학교로 달라졌다.
그럴 즈음 영흥국민학교의 연간 졸업생은 100여명, 재학생은 1천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엔 포항의 공업도시화로 팽창이 가속화됐다. 영흥초교로서는 학생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주변에 다른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 송도국민학교, 1974년 대해국민학교, 1981년 송림국민학교가 개교했다. 영흥국민학교에 다니던 많은 학생들이 전학 갔다.
그리고 이번엔 출산율 하락이라는 또 다른 변화의 시기가 다가왔다. 교세가 더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영흥초교는 전학년 합쳐 일반 8학급에 특수 1학급, 유치원 1학급으로 구성돼 있다. 2만여명에 이르는 졸업생을 배출한 뒤 몸집을 줄인 채 고고한 명문초교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영흥초교 출신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다. 이병석 국회의원이 이 학교를 졸업했고, 김상기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다.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 산 영흥초교는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걸 위해 일년 전 일찌감치 기념사업회도 발족시켰다. 사업회는 100년사 편찬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100주년 기념탑, 3·1운동 기념탑, 설립자 흉상, 100주년 기념동산, 100주년 역사관 등의 건립도 진행시키고 있다. 지난 5월15일에 앞당겨 개교 100주년 기념 체육대회도 열었다.
이병석 총동창회장은 “인재양성을 통해 조국광복운동과 일제 저항운동을 펼쳐 온 영흥학교가 맞은 100년은 한국 근대사 100년과도 맥을 함께 하는 것”이라며 “나라의 앞으로 100년 또한 영흥초교 졸업생들이 힘을 모아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김남희기자 ysknh0808@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