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정오의 희망곡`으로 잘 알려진 이 시인은 현재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자 소설가, 비평가이면서 러시아 미학을 전공한 학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세련된 특유의 감수성을 선보이며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실재를 서늘한 눈빛으로 꿰뚫어본다. 전통 서정시의 외형을 허물고 재래의 익숙한 서정과 정형화된 시의 문법을 비트는 파격이 색다른 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미묘한 서정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장욱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사뭇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 감각적인 이미지 묘사는 박진감이 넘친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시인은 “근육질의 눈송이들”이 “꿈틀거리는 소리”를 듣고, “점 점 점 떨어”지는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을 예감한다.
“넌 누구냐?/가까워서 안 보여//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근육질의 눈송이들/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너는 너무 가까워서/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겠지만//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점 점 점 떨어질수록/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우리의 머리 위에 정교하게 도착한다는 것”(`겨울의 원근법`부분)
시인의 예감은 현실이 되어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하다가 “계란의 속도로 부서”진 후 “뜨거운 이야기”(`겨울의 원근법`)로 번져간다.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고요한 세상`의 해체(`내 잠 속의 모래산`)와 `자아의 실종`(`정오의 희망곡`)에 골몰했던 시인이 이제 “입을 벌리는 순간/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나고 “곰곰 생각하고 생각한 후 간신히/생일 다음에 오는 불안에 대해/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당신이 말하는 순서`).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수평선은 생후 십이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십이년 전의 그날이 먼 후일의 그날이다가,/수평선이다가,/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연인들은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 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생년월일` 전문)
축복받아 마땅한 `생일`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시인에게 세계는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고 “자꾸 무너지면서 또/발생하는” “등뒤의 세계”(`뒤`)이다. “신호등이 지배하는”(`세계의 끝`) 이 세계에서 시인은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동사무소에 가자`)나 “모퉁이를 돌면 남자의 성기가 나타나고/아무리 걸어가도 큰길은 나오지 않”고 “운구차가 영영 들어오지 못하는”(`재크의 골목`) 골목, “지진에만 반응”(`특성 없는 남자`)하는 횡단보도 등과 같은 일상의 후미진 구석을 떠다닌다.
일상이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생일`을 지속하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함돈균 `해설`)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생일`은 태어남에 관한 것인 동시에, 일상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생년월일`에 관한 “모든 것이 있는 곳”, “시작과 끝이 명료”하고 “간결한 곳”,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는 더이상 예측 불가능한 일이 남아 있지 않은 일상의 공간이다. 이 빈틈없는 일상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질문. “질문이 없는” 세계, “의심”하지 않는 이곳은 세계의 끝이다. 그리고 일체의 질문이 소거된 세계의 끝에서 문득 “동사무소란/무엇인가”라는 세계 형식 자체를 문제 삼는 최후의 질문이 출현하는 순간, 세계의 모순은 드러나고야 만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개체들의 `탄생`과 개체들이 모여 이룬 세계의 `지속`과 그것이 곧 `끝`이 되는 세계 풍경의 묵시적 묘사이기도 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