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싼 값으로 팔아도, 남이 주은 돌은 사지 않고 억만금을 준대도 내가 탐석해 지닌 돌을 팔지 않는 걸, 생활신조로 삼았다.
조립식 건물 서재에 두서없이 흩어진 수석을 재발견하고 감동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오늘도 나는 가끔 들리는 서재, 도서진열대에서 돌에 눈 하나가 박힌 돌을 발견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적어도 내가 주은 돌은 어느 강에서 건지고, 그날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을 거의 정확하게 떠올리고 감동에 젖을 때가 더러 있다.
돌에 안구 하나가 박힌 저 돌, 독안석(獨眼石)에 대한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낚시를 자주 하는 친구가 강에서 주어 와서 이리보고 저리 봐도 별 볼일 없다고, 내동이친 걸 아내가 주어왔다.
처음에는 `독안석`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몇 십 년을 탐석해온 수석수집가도 독안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못 봤다.
내가 어릴 때 같은 동네인 섶밭마을(모전)에 나보다 여남살 위인 만근형이 살고 있었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당당했지만 눈 한 알을 어디에서 분실했는지 애꾸눈이다.
애꾸눈이 되어 6·25 북새통에도 군대도 못 갔기에 안죽도 동네를 혼자 지켰고 6·25 사변으로 서울이 잿더미가 되어 고층건물을 다시 지을 때 만근형은 건설현장의 필수요원이 되었다.
등 발 좋고 힘도 끝내주고, 눈도 애꾸눈이라도 사물을 알아볼 수 있고,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고소공포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애꾸눈은 고저구별이 잘 안 되어 두눈박이는 오금이 저려, 고층공사현장에 얼씬도 못하는데 만근형은 고공에서 전혀 위험도 느끼지 않고 자유자재로 작업을 잘해내어 떼돈을 벌고 서울에 보금자리도 마련하고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서울에서 성공한 촌놈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섶밭마을의 노는 친구들을 불러올려 그들도 만근형 덕분에 서울에 제집을 마련하고 촌놈에서 일약 서울시민이 되었다.
사실 애꾸눈은 한눈밖에 없기 때문에 분명히 실명은 아니지만 두 눈 가진 사람만큼 눈의 역할이 확실하지 못하다.
앞에 잠깐 말한 바 있지만, 높낮이 감각이 없다고 한다.
만약의 경우, 하나 남은 눈을 다치면 완전 실명을 하게 되어 소경이 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다.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은 외눈박이를 애꾸눈이라 놀려댄다.
`애꾸눈`인 사람은 그 자체로도 눈의 기능이 온전하지 못하여 살아가는 게 불편한데, 덤으로 눈치까지 보고 살아야 하니, 사람은 아무래도 건강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된다. 내가 지닌 `독안석`이 희귀하고 개성이 넘쳐난다. 나도 문단에서 `풍자시`와 `에세이`에 독안석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명석(名石)도 산수경석 같은 것은 흔한 편이다.
가끔 독안석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내 시도, 내 수필도, 독안석처럼 사람들 눈에 성큼 다가서고 가슴에 설렘을 주는 명품(名品)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나 자신도, 밤에도 독안석처럼 눈먼 이 땅의 불침번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