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가 밀접한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의리를 지키고, 서로 협력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임을 깨우치게 하는 말이다.
세상에는 이런 순망치한의 관계가 아닌 경우가 그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문제다. 특히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많아서, 순수를 생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작가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대구에서 개인전을 가질 때다. 두 사람의 화랑 사장이 우리나라에서 꽤 알려진 어느 작가의 작품을 앞에 놓고 고객에게 얼마를 불러야 할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그림을 사고파는 것이 그들의 업이고 보니 상품가치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 낮은 소비자에게 왜 이만한 값이 매겨진 것인가?
그 이유를 찾는 모습이었다. 그 작품은 물방울 작가로 잘 알려진 작가의 초기작품이었다. 그들이 가격을 매기기 위한 조건들이 조금은 황당했다.
화면 전체에 그려진 물방울 개수를 일일이 헤아리고, 물방울 각각의 크기와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커다란 돋보기로 비춰보면서 살피는 것이었다.
캔버스 천은 무엇이고, 물감은 어떤 제품이며 붓 터치는 어떤 방향으로 나있는지까지도 모두가 다 가격산출의 근거가 된다는 것.
이들에게는 작품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매기는 데 필요한 요소들만을 후벼 파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질 때도 역시 똑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나는 1년에 수차례씩 그룹전이나 부스 전 참여를 권유받는다. 내막을 잘 몰랐던 초창기에 서울의 어느 기획사가 한다는 부스 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부스 대관료와 팸플릿 비로 수십만 원을 지불하고 많은 운송비를 들여서 열흘 동안 전시를 했다.
처음 주최 측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조건들로 보면 중앙화단에 작가를 알리는 홍보 효과도 클 뿐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매각된다는 말이 가난한 작가들에게는 달콤한 꿀맛이라고 여겼다.
순진하게시리 오직 그들의 말만 믿고 참여를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장삿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안 것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주최 측에서 이미 띄우기로 약정된 작가의 들러리로 지방의 작가들을 초대한다는 형식을 빌려, 실속을 챙기면서 무슨 선심이나 쓰는 양 순진한 지방작가들을 꼬드긴 것이다.
전시 중 마침내 옆에 있었던 작가의 소품 한 점이 관람 온 사람에게 우연히 팔리게 되었다. 그러자 주최 측에서 처음 제시했던 작품매각 조건을 무시하고 5:5로 반을 내 놓으라고 했다.
그들이 처음 제시한 조건은 3:7로 매각 시 작가가 70%를 가져간다는 것이었는데 온갖 구실을 붙여서 기어코 절반을 갈취한 것이다.
그 일을 목격한 이후에도 별별 달콤한 제안의 전시회에 출품했다가 작품이 팔렸다는 연락만 받고 결국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한 예도 더러 보았다.
그 후론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출품만 해줘도 된다는 제의를 거절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법적 대응으로 맞서면 될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복잡한 문제에 얽히는 것을 싫어하는 작가들의 심리를 이용한 장사치들의 고단수 계산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품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작가를 발견하면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서 소위 전속작가라는 올가미를 씌운다. 그리고 잘 팔릴 수 있는 그림을 아예 주문식으로 강요한다.
한 달에 몇 호이상이라는 규정으로 작가의 고혈을 빨아대는 것이다. 가난한 작가에겐 처음에는 만지기 힘든 돈이었으니 그들의 요구도 감지덕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이미 건강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세월 지나면 그림일 뿐이지 작품은 되지 못하니, 결국 작가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술을 알고 예술가를 인정하며 순망치한의 관계로 상생할 줄 아는 화랑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