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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의 작곡가 樂聖 김동진 선생

슈퍼관리자
등록일 2009-08-25 22:20 게재일 2009-08-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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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31일 한국의 가곡 작곡왕, 김동진 선생이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천박한 언론 플레이와는 담은 쌓은 정갈한 한뉘였기에, 필자는 김동진 선생의 생사조차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김동진 선생의 서거를 TV는 간단히 1회 뉴스로 끝냈다.

20대의 대중연예인이 자살하면, 국상처럼 호들갑을 떨던 방송이 진짜 최고의 예술가 죽음은 조명도 비켜갔다. 진정한 가치가 뭔지 모르는 방송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악성(樂聖) 김동진 선생은 1913년 평남 안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음악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우리나라 개신교가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것은 만인이 익히 아는 바지만, 특히 서양음악의 보급은 교회의 절대적 공로였다. 교회의 풍금은 한국음악가의 산실이다.

김동진도 교회에서 풍금으로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적 자질과 실력을 키워나갔다.

평양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바이올린 피아노 작곡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음악에 천재적 소질을 지닌 김동진은 김동환의 시 `봄이 오면`을 18세에 작곡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대표작인 `가고파`(이은상 작사)는 20세에 작곡,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했다.

`가고파`는 김동진의 숭실전문학교 은사 무애 양주동 교수의 `가고파`소개를 감명깊게 듣고 작곡한 것인데 김동진의 대표곡이자 한국가곡의 대표곡이기도 하다.

김동진은 1950년 12월 평양의 교수직을 팽개치고 자유대한을 찾아 월남했다.

월남하고 `가고파`의 시인 이은상 선생과 생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김동진은 `가고파`1부를 지은 지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가고파`2부를 작곡했다.

`가고파`1부는 `가고파`의 첫수(首)부터 6수(首)까지요, `가고파`2부는 7수(首)부터 마지막 10수(首)까지다.

예술가는 일관된 신념이 있어야 한다.

김동진은 이렇게 하여 그의 대표작을 마무리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내가 `봄이 오면`을 음악 시간에 배운 것은 18세 되던 고 2시절에 배웠으니 김동진 선생이 18세 때 지은 곡을 나는 비로소 18세에 불렀으니 김동진 선생은 확실히 천재 작곡가시다.

`뱃노래``파초``목련화``못잊어`등 김동진 선생이 작곡한 작품은 명곡이 아닌 것이 없다. 타고난 음악성에다 일본 동경에 있는 `동경 일본 고등 음악학교`(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김동진 선생은 가곡뿐 아니라 `심청전``춘향전`판소리를 가곡으로 만들었다.

선생의 노익장은 못 말릴 정도여서 84세의 고령으로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하셨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 내가 `악성 김동진 선생`을 졸필로 그린다니 주제파악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아 못내 송구스럽다.

가곡 `목련화`는 경희대 음대 교수재직시절에 작곡한 것으로 `목련화`의 작사자는 경희대를 있게 한 조영식 박사가 작사자다. 나는 꽃 중에 목련꽃을 제일 좋아하는데 김동진의 곡 `목련화`를 들으면 더욱 목련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어지는 것 같아 좋다. 김용호 시인 작사, 김동진 선생의 곡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을 들으면 불우한 가정형편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지난날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의 아들이 김동진 선생의 자서전을 읽고 내게 들려준 말이다.

김동진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좋은 곡을 쓰기 위해 애쓰지 말고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 먼저 애써라. 좋은 인간이 되면 좋은 곡도 절로 쓰여지게 된다. 좋은 곡이 좋은 곡(曲)이 되자면 저력 있는 연주자를 만나야 한다.”

김동진 선생은 한국의 슈베르트라 한다.

한국의 가곡 왕이란 뜻이겠다.

김동진 선생이 90평생에 남긴 곡이 500편이 넘는다.

곡마다 명곡 아닌 것이 없다. 김동진 선생을 `명곡제조기`라면 실례 천만이요, `명곡의 산실`이라면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도 조용히 한 생을 사신 김동진 선생님은 인품도 명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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