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임박한 원고를 정리하다가
어스름 저녁 괜한 허기가 밀려와
바람도 쐴 겸 나섰습니다.
제법 따사롭게 내리쬐던 대낮 햇볕이 돌아가자
바람 훌훌 내달리는 경사진 골목,
아주머니들 서넛 씩 모여 놀던 수선집도
참좋은약국도 온누리약국도
오늘은 쉬는 일요일이네요.
기우뚱한 탁자가 있는 분식집에서 수제비 한 그릇 주문하고
구겨진 신문을 대충 훑다가
창 밖 풍경 물끄러미 내다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쯤이면 신협 앞에서 학원 버스를 기다리던
왁자한 어린 중학생들 오늘은 보이지 않아요.
녀석들 오랜만에 마음 놓고 게임을 하거나
마을 공터에 모여 한껏 농구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오후 서너 시쯤이면
금방 해 온 반찬들을 펴고 팔던 새댁의 파라솔도
야물게 접혀져 있습니다.
그녀에게도 오늘은 아이들과 나들이 가거나
고단한 몸 쉴 수 있는 그런 날이겠군요.
그렇다고 그 자리들 텅 비어 있는 건 아니었어요.
햇마늘을 잔뜩 싣고 온 트럭
밀짚모자를 쓰고 떨이를 외치는 아저씨에게로
한 접씩 혹은 반접씩 흥정하고 주문하는 아낙들 모여들고
햇감자 애호박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 앞에는
모처럼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중년의 남편도 서 있습니다.
반바지 차림으로 과일 전에 닿은 젊은 아버지는
살구 하나를 웃옷에 쓱쓱 문지르더니 반으로 갈라 씨를 빼고
아들 딸 입에 쏘옥 쏘옥 넣어 주네요.
아, 달고 신 살구가 제게도 옵니다.
또 하나의 저녁이 저렇게 모퉁이를 돌아가네요.
손수제비 구수하게 끓는
이 자그마한 분식집 아주머니 낡은 앞치마에서,
몇 줄 문장 간곡히 기다리던 내 푸석한 무릎에서,
공평하게 노닐던 하루가 저리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