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작가들은 취향에 따라 그리는 소재가 한 방향으로 쏠리는 경향이 많다. 풍경화나 인물화, 정물화, 동물화 등 각자의 정서에 부응하는 소제가 화면을 채우다 보니 그것이 그 작가의 고유한 화풍이 되기도 한다.
내가 프로의식을 갖고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많은 소재로 삼은 것이 풍경이다. 너무 편식적인 화풍에서 벗어나려고 정물화와 인물화에도 손을 대 보지만 금방 싫증이 나서 다시 풍경화로 되돌아온다. 아무래도 심연에는 자연에 대한 경외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수년 전 동남아스케치를 다니면서 일 년 내내 푸른 수목으로만 덥혀있는 풍경이 얼마나 지겨울까라고 느꼈다. 그 후론 지혜로운 조상님들 덕에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에 태어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말을 외고 다녔다.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그림을 보더라도 거의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며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음을 본다. 한시도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깨닫고 그것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동양회화의 사상적인 기조가 된 것은 바로 동양의 자연관이다. 일찍이 동양은 만물의 시원(始原)으로서 천지인(天地人)의 삼재가 상호작용을 통하여 조화를 이루며, 공생하는 것이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모든 만물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 그 이상이나 이하도 아니라는 개념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합일사상이 회화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동양에는 자연스럽게 풍경화로 대변되는 산수화가 발달하게 되었고 그것이 동양회화의 출발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화 그 자체가 동양회화의 주류로 볼 수도 있다.
이렇듯 자연이 주제가 되는 동양회화에 비해 서양회화사에서는 풍경화의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근세까지도 서양회화의 주체가 되었던 인물화의 배경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고전파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라파엘의 그림을 비롯하여 19세기 인상주의 직전까지도 자연을 그린 독자적인 풍경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이후 프랑스의 밀레나 루소, 쿠르베 등이 파리근교 바르비종에 모여, 서정적인 감동으로 화폭에 풍경을 담으면서 소위 바르비종파, 자연주의로 불리는 풍경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인은 서양문화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바로 서양문화의 근본이 되는 인본주의가 회화에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서양문화의 근간인 기독교의 창세기를 보면 서양의 자연관이 잘 표현된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여섯째 날까지 이 세상천지를 창조하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만들어 그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다.”
모든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최고의 사명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은 인간의 정신에 대조되는 객관적인 물질의 개념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연은 끊임없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간에 의해서만이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긴 서양화의 자연관에 비해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합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양화의 자연관과는 꽤나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동서양의 회화를 특징지어준 요인이다.
최근 들어 국가의 정책으로서 녹색성장이란 말들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지금 전 세계는 기후변동으로 야기되는 환경위기와 고유가로 인한 자원위기의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서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인류문명이 붕괴되는 환란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많은 국가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연이 무너지면 살아남을 인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이 아침 한 편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생존의 울타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