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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다녀와서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9-06-10 19:58 게재일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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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인 영일고 1

신입생 첫 봉사 가는 날. 쌀쌀한 바람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각 반마다 다른 곳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 반은 영일 고등학교 학생들 중 처음으로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전승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내외 학생들이 꽃다운 나이에 의무도 아닌데 스스로 조국 수호에 나섰던 그들의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우리는 먼저 6·25전쟁에 대한 영화를 봤고 그 다음 6·25전쟁에 참전하셨던 최 현우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먼저 학도 의용군 전승 기념관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해 주셨고, 그 뒤 본격적으로 6·25전쟁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라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꼼꼼히 강의를 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10월1일이 우리나라가 최초로 전쟁에서 휴전선을 넘어간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군의 날이라고 지정한 것과 인해상동작전에 대해서 또 양동작전에 대해서 등 6·25전쟁에 대한 것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강의를 마치면서 문제를 내셨는데 “깨버리면 하나, 안 깨면 둘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였다. 정답은 휴전선 이였고, 선생님께서는 통일이 꼭 돼야 한다는 말씀과 같은 마음으로 쪼개져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해 주셨다.

선생님의 멋진 강의가 끝나고, 우리는 1층 기념관으로 갔다.

1층에는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총을 들고 적과 싸우는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과 전쟁에 참여한 학생들 사진, 학생들의 시계, 교복단추 수통 등의 유품과 유물, 6·25전쟁으로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 등 많은 것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쟁 중에 전사한 이 우근 학도병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어머니께 쓴 편지였다.

편지의 시작은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데, 자신이 적을 죽였다는 것과 전쟁은 왜 해야 하는지, 또 내복을 보니 자꾸 수의가 생각난다는 것, 그리고 전쟁이 어서 끝나 어머니 품 안에 안기고 싶다는 것 등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너무 깊이 남겨져 있는 편지였다.

특히 ‘죽음보다 어머니와 형제들을 못 만난다는 두려워 진다는 것’과 마지막 부분쯤에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 부분들에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되었고, 전사했다는 소식에 더욱 가슴이 아팠고,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이 분들의 꿈을 희생으로 자유로운 우리나라를 가질 수 있었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너무 무엇이든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분들의 ‘애국애족정신’과 ‘희생정신’ 그리고 ‘구국정신’은 우리가슴속에 꼭 새겨둬야 할 정신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기념관을 나와 우리는 충혼탑을 보러 갔다. 이곳은 어린 나이의 학도들이 교복을 입고 학도의용군으로 반공 구국전선에 자진 입대하여 대한의 젊은 학도의 기백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산화한 김 춘식 외 47명과 더불어 1천394위의 영령들이 봉안되어있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꽃다운 나이에 한참 즐겁기만 할 나이에 전쟁이라는 무서운 곳에 말려들어 하루하루 동료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속에서도 계속해서 전쟁에 참여하며 전사한 사람들 때문이다.

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학생들을 정말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전쟁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못한 나를 꾸짖게 되었고, 앞으로는 학도의용군들처럼 내 나라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전승기념관은 우리 학생들에게 정말로 뜻 깊고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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