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공식적으로 중앙문단에 오른지가 올해로 어느새 마흔 세 해가 되었다.
그간 지은 시는 2000편에 이르고, 발표한 시도 줄잡아 1천편이 넘는다. 일당백(一當百)은 사양하기로 하고 줄이 일당십(一當十)은 됨즉하다.
내가 지은 시중엔 제목이 ‘무제’로 된 것은 한,두 편이 될까 말까지만, ‘사는 법’이란 제목으로 몇십편의 시를 지었다. 사실 인생이란 ‘삶’자체, 곧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사느냐?가 생존만큼이나 중요하다.
조선시대의 특징은 철저한 신분사회라는 점이다. 아버지가 도저한 고관대작이라 해도,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첩이라면, 신분이 양반이 아닌 서얼, 얼치기로 문관(文官)이 될 수 없다.
당하관에 그치는 기술관시험인 잡과에 응시하거나 무과는 볼 수 있지만, 문과는 원천봉쇄가 되었다. 이렇게 철벽같은 신분사회임에도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사람의 예외가 있다. 양반의 서자지만, 최고관직인 정1품에 오른 사람이 둘 있다.
유자광은 서자로서, 1468년 세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출세를 위하여 못할 악행이 없는 못 말릴 사람이다. 조선시대 최연소 병조판서인 남이를 역모로 무고하여 젊은 원귀를 만들고 정1품의 공신 ‘무령군’이 되었다.
남이장군은 태종의 외손자로 1457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수석합격)를 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세에 병조판서가 되고 오랑캐 근거지 건주위를 정벌하여 앞날이 촉망됐지만 남이의 한시 ‘백두산시’를 왜곡하여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이라 무고하여 쾌남아 남이장군이 한갖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유자광은 첩의 소생으로 음모와 처세의 달인이었다.
연산군 때는 무오사화를 일으킨 간신이었지만 중종반정 때는 서희안의 천거로 중종반정공신이 되어 그간의 악행에 면죄부를 받고 천수를 누리게 된다.(1512년 사망)
유자광은 충신 남이를 해코지하여 서자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오를 수 없는 361품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에게 벼슬이 전부가 아니다.
유자광은 큰 음모를 조작한 역사의 큰 죄인으로 백세유취, 영원한 세월에 걸쳐 더러운 냄새를 풍기게 되었으니 품계만 높다고 올바른 인물은 아닌 것이다.
유자광은 자기의 영달을 위해 죄없는 사람을 서슴없이 위해하고 형식적으로 최고품계에 이르렀지만, 우리 역사에 쓰레기 같은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유자광은 자기출세에 소경이 되어 죄없는 충신을 죽이고 최고품계에 착지했다.
죄없는 남을 죽게 함으로 361품이 된 유자광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서얼이면서도 남을 살리는 인술을 발휘하며 361품에 오른 이가 익히 아는 대로 의성(醫聖) 허준 선생이다.
허준 선생은 무관인 아버지 허륜과 첩인 어머니 손씨 사이에 태어났는데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고 명종때 태어났다고 한다.
이은성이 지은 ‘동의보감’에는 허준이 잡과에 1등 합격하여 혜민서 의관이 되었다 하지만 과거 합격자 명단집인 ‘국조방목’에는 허준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3년마다 한번 실시하는 잡과 의관 시험에 응시자가 보통 4천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합격자는 8명이 고작이다.
허준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의관이 되었을까?
미암 유희춘 참판(차관)이 지은 ‘미암일기’에 허준을 의관으로 천거한 사실이 적혀 있다. 허준은 의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전라도 감영의 ‘심약’(종 9품)직을 맡고 있었다.
요즘 관직으로 따지면 도청 보건과장쯤 되는 자리다. 서울의 혜민서 의관이 되기 전에 지리산에서 약재를 채취하는 관리로서 향약재료에 조예가 깊었다고 본다.
천거로 의관이 됐든, 잡과 등과로 의관이 됐건 병 잘 고치는 게 명의다. 선조때 전의가 된 허준은 피난지 의주까지 수행하여 선조 건강을 잘 챙겨드리고 전후의 전염병 치료에도 전력 투구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허준은 호성공신3등이 되어 정1품의 품계를 받게 된다.
사간원, 사헌부의 쌍날 공격도 허준의 실력과 진실 앞엔 드디어 무릎을 꿇는다.
허준은 광해군 때도 어의로서, 광해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게 된다. 적군이 물러간 전후에도 오히려 병마는 기승을 부려 많은 환자를 치료하기에는 의관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허준은 자기가 겪은 경험을 의서로 엮어 많은 사람이 쉽사리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선조의 어명으로 짓게 된 ‘동의보감’은 16년간 저술했는데 분량도 25권이나 된다.한국·중국·일본의 동양 3국에서 발행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의학서적으로서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높은 콧대도 동의보감 앞에선 정상을 찾게 된다. 종이도 시원찮고 필기도구도 불편하던 시절에 동의보감이란 만리장서를 적어시기에 연세 많은 허준대감의 노고가 오죽하셨을까.
숭고한 허준선생의 인간애가 두고두고 고맙다. 허준선생의 노고가 헛되지 않아 요사이 한의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렇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