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교였던 유교는 오로지 현세뿐이다.
사후를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로 답했다. 유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조선시대는 풍수가 대신해서 종교의 역할을 상당부분 떠맡았다.
무위(無爲)철학을 부르짖었던 노장(老莊)사상에서마저 불로장생(不老長生)관념이 유행했었던 것으로 보면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공포로 여겼던 것 같다.
윤회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힌두나 불교의 사생관(死生觀)은 현세의 죽음은 이승의 끝이자 저승 삶의 시작이니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
소낙비가 자주 내리는 여름 오후시간, 부자(父子)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얘기를 나누고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혼침(昏沈)에 빠져 있었다.
이상스럽게 생긴 벌레 한 마리가 소나기로 불어난 물에 갇혀 섬을 맴돌고 있는 것을 보고 어린 아들이 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주니 그 벌레는 다리를 건너 댓돌로 올라왔다고 한다.
기둥을 타고 올라온 그 벌레는 툇마루를 건너 사랑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옷깃을 파고들었다 한다. 두 사람이 진작 잡아 죽일 것을 하고 후회하는 사이 이때껏 혼침에 빠져 있던 할아버지가 일어나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다.
“ 내가 저승엘 갔다 오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강을 건널 수가 없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문득 다리 하나가 범람하는 강물 한가운데로 놓여 잘 건너왔다고 하셨다.
옛 어른들은 비 오는 여름날은 외출을 삼가고 부득이한 외출은 바닥이 듬성듬성 짜진 짚신을 신었다고 한다. 짚신 바닥에 깔린 미물의 생명조차 구하기 위해서일 만큼 생명을 귀하게 여겼다.
특히 여름 날 비가 개인 오후에는 온갖 미물이 길 바닥으로 숱하게 기어 나온다. 이날 싣는 짚신은 밑바닥 가닥을 듬성듬성 잡아 미물도 인간의 발길에 밟혀 죽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미물의 생명까지 귀하게 여긴 옛 어른들이 요즘처럼 쉽게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을 보았으면 담뱃대로 치는 불호령이 떨어 졌을 터.
어느 미국 고등학교의 죽음교육 커리큘럼을 보면 ‘죽음에 관한 책·시·음악공부· 죽음 영화·장례식장 방문’ 등 다양하다. 미국의 공립 초·중·고교가 이런 과목을 교육한 지 20년이 넘었다.
이웃 일본에서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은 7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남편보다 10여 년씩 더 산 노인들이 슬픔과 고독을 이기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 교육 프로그램도 있다.
출가정신이 몸에 밴 인도의 노인들은 때가 되면 우리처럼 재색명리에 집착하지 않고 부부는 이별, 더 나은 윤회를 위해 출가 정진한다. 수행생활이란 자신과 세상을 구하겠다는 간절한 뜻이 없다면 정신 육체에서 이보다 더한 고문은 없을 것.
남과 달리 무엇을 이루려는 선지식이 되려면 맹독을 가진 독사와 한방에서 살듯이 하루하루를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생명을 쉽게 놓아버리는 이들을 건질 처방전을 국가가 내놓아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나라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생명의 끈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이가 너무 많은데 특히나 걱정스러운 것은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교통사고의 배로 높다는 것.
인터넷에서는 자살사이트에서는 온갖 방법을 다 내놓는 등 자살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도 사회교육은 과거의 것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