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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엄원태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9-06-08 19:18 게재일 200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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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다는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했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잡이 뱃불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쭉하던 초생달까지 내게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뚱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 엄원태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2007)


엄원태의 시 ‘애월’은 절절한 별리(別離)의 슬픈 노래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아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이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진 가슴 아픈 사랑 노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던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라는 도입부의 단정적 시구가 독자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판다. 시 ‘애월’에서 시인의 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한 곳은 단연 3연이다. 쉼표가 거듭 쿡, 쿡 찍혀 있고, “-던가”라는 표현이 무려 5번이나 이어지는 이러한 시적 표현은 가버린 지난 사랑을 회억(回憶)하는 시인의 애절함이 가히 폭발적임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지명(地名)인 ‘애월’을 거듭 말한다면 엄원태 시인은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고 한다. 아, 나는 시인이 내민 이 백지 위에 다른 말씀 한 자(字)도 달리 적지 못하겠다.

해설<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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