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 편집국/부국장
내가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하는 경주의 한 대중 목욕탕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이 풍경은 자주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 꼴은 분명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하게 되고, 특히 생전에 살갑게 모시지 못함에 대해 죄스럼 마저 느낀다.
이 화면은 짐작컨대 팔순 노인과 60대 아들이 목욕탕에 함께 오는 장면이다.
자식 도움없이는 거동하기 어려운 노인이 전라(全裸)가 됐을 때 왜소한 몸은 아들의 반 정도가 될 듯 하다.
노인을 모시고 오는 아들 또한 희끗희끗한 머리와 함께 손자가 있을 법한 적잖은 나이임을 풍기며, 언뜻 보면 두 사람을 부자지간이라기보다 형제처럼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부지’라는 호칭을 통해 부자지간임은 확인된다.
이 늙은 아들은 꾸부정한 고령 아버지의 옷을 벗긴 후 손을 잡고 탕 내 들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케 한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탄력을 잃은 아버지의 몸을 씻기면서 나누는 정담도 아름답게 보인다. 물맞은 노인의 얼굴에 비치는 미소는 영판 젖먹이 아기들이 목욕할 때 짓는 해맑은 표정과도 흡사하다.
물론 이 부잣(父子)집에 샤워 시설이 없다고 볼 수 없지만, 아들이 일주일에 한번은 꼭 아버지를 모시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오는 것이 꼭 효도라기 보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 대한 ‘기쁨’이 아닐까 한다.
노인 또한 아들 어릴 적에 목욕탕에 와서 떼를 밀어주던 50년 전에 ‘따뜻한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이 노인은 아들의 효심(孝心)에 대해 이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야 이놈아, 네가 나를 목욕을 시키는 것 처럼 나 또한 너를 낳아 걷지도 못할 때 매일 너를 비누 방울로 씻긴 적이 있었지.”라는 ‘손길의 바꿈’으로.
아버지 생각과 달리 아들은 골 파인 아버지의 피부를 쓰다듬으며 “아버지, 이 골 한마디 한마디는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시다 생긴 흔적이 아닐까요. 제가 골을 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면서 손길을 놀릴 것으로 추측을 해 본다.
노부자(老父子)간의 목욕을 통해 인생역전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고, 다만 천륜(天倫)의 손길만 역전된 것이어서 이 장면이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이 노인이 목욕을 끝낸 후 평상에 앉아 나눈 대화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야야, 환갑은 했느냐.”
이 말에 60대 아들은 “요즘 누가 환갑을 합니까.”
참 그렇다.
예전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환갑잔치가 성행했다.
이는 과거 사람들이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환갑을 맞이하는 일은 경사스러웠고, 그 자손들이 잔치를 베풀고 축하하는 관습이다.
이러한 축하 잔치는 더 오래, 풍요롭게 살라는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부터는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고, 또한 의미는 없기에 이 잔치를 생략하며,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는 등 세태 변화가 일고 있다.
그렇지만, 노인은 가물가물하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실눈으로 보는 자식의 나이가 환갑쯤 됐지않았나 해서 물었지 않았나 한다.
비록 육신이 건강하지 못하고 기억마저 왔다 갔다 할 망정, ‘사랑하는 내 아들이 환갑 상은 받아 먹었겠지.’ 하는 노인의 걱정으로 보자.
노인은 또한 “아무리 네가 나이를 많이 먹어도 자식이기에 너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라고 물을 수 있는 ‘아버지의 힘’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기우(杞憂)라며 웃음으로 대답을 할 수 있지만, 이는 분명 뗄 수 없는 피로 엮인 ‘고리’와도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서거(逝去)했다.
그의 자살 동기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고 추측만 있을 뿐이다.
그의 나이는 불가 60대 초반이며, 한 때 대한민국을 호령하던 통치권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지도자라면 국가를 위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한 ‘대통령직’을 떠났다 하더라도 국가를 위하는 ‘기본적인 책임’마저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인과 주변의 문제를 책임을 지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것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연약한 이가 수천만 명의 목숨이 달린 국가를 운영한 것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찔할 뿐이다.
하물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팔순의 노인마저 자식을 걱정하는데, 국가 지도자였던 이가 적어도 국가의 안위와 미래, 위상, 그리고 가족을 사랑했다면 선택한 그 ‘길’은 오판(誤判)이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