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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울 때 ... 고영민

관리자 기자
등록일 2009-05-18 20:48 게재일 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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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저녁 길을 걸어와


천천히 옷 벗어 벽에 걸어두고


쌀통에서


한줌,


꼭 혼자 먹을 만큼의


쌀을 퍼


물에 담가놓으면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먹는 소리



어머니는 그 소리를 쌀이 운다고 했다



- 공손한 손(창비·2009)





고영민의 둘째 시집 ‘공손한 손’에는 작고 여린 것들을 공손하게 모시는 연민의 젖은 눈빛이 가득하다. 이런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던가. 아프고 불쌍한 것들을 내 것 인양 뜨겁게 끌어안는 그 마음이 시의 본디 빛깔이 아닐까. 향기를 밖으로 내보내고 제 몸을 태워 시커멓게 상한 모과를 노래한 ‘모과불’, 경주 남산의 목 없는 석불 이야기를 다룬 ‘입’, 여물지도 안은 채 떨어진 풋 모과를 “둥지에서 덜어진 새 새끼와 같은, 슬픈 것”이라 부르는 ‘모과라 부를 수 없는 것’을 비롯하여 ‘매미’ ‘공손한 손’ ‘한김 나간 뒤’ ‘아랫목’ 등의 시편들이 그 예이다. 당신은 ‘쌀이 우는 소리’를 들은 적 있는가? 국민학교 3∼4학년 때 늘 아픈 엄마 대신 세살 위 정숙이 누부가 정지에서 쌀을 씻을 때 그 소리를 나는 들었던 것 같다. 쌀이 우는 소리를 듣는 일은 그 처지가 울음과도 같을 때 가능하겠다. 위 시에서도 고달픈 삶을 의미하는 “마른 저녁 길”을 걸어온 시적 화자가 제 혼자서 밥 해 먹을 쌀 씻을 때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거다. 이 쌀이 우는 소리는 시골에서 혼자 살고 있는 화자의 어머니가 일러준 것이다. 우리 사회에 쌀이 우는 소리와 외로움의 눈물을 함께 섞어 혼자서 밥을 하고 또 그 밥을 혼자서 먹어야 하는 외로운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 좋겠다. 마흔이 훨씬 넘도록 아직 장가도 가지 못하고 매일 혼자서 밥을 해먹고 사는 고향 친구 열이한테 잘 있는지 오늘은 전화라도 한 통 넣어봐야겠다.



해설<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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