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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語) 땀시롱 (때문에)

김시종 기자
등록일 2009-05-18 20:50 게재일 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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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때문에 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진정한 문인(文人)이라 할 수 없다.


고려 때 한림학사던 김황원은 유(有)짜 명(名)짜한 문장가로 대동강 부벽루에 앉아 대동강 시를 대뜸 읊어댔지만, 끝내 마무리할 말을 찾지 못해 두 다리를 쭉 뻗고, 정자 위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평생 말을 다루던 시인이 오죽했으면 말이 모자라 사내체면을 접고 울어댔겠는가. 지금도 내게 경치를 두고, 즉흥시를 한 수 지어 보라고 무례한(!) 주문을 하는 이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의 경우, 저절로 생각이 날 때 시를 짓지, 억지로 시를 지으려고 덤빈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무리 시에 능통하다고 해도 경치-자연풍광을 두고 지으면 개성이 없고, 천편일률적이 되기 쉽다.


지난날 나는 중학생시절부터 문학소년이었지만, 글씨솜씨가 영 엉망이어서, 원고정리 장벽 때문에 당시 잡지계의 총아던 ‘학원(學園)’에 산문을 투고하고 싶었지만, 난필유죄(亂筆有罪)라서, 뜻을 접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내가 지은 짧은 유머를 ‘학원’에 보내 문경중 3학년 때 ‘학원’9월호에 ‘O형’이 발표됐다.


200자 원고 한 장 분량이었는데, 이웃에 사는 학우 서경수가 대필(代筆)을 해주었다. ‘학원’에 유머는 보내는 족족 발표가 되어 학생코미디언(?)으로 전국적인 명사가 아닌 명물(名物)이 되었다.


장난스런 ‘유머’보다 본격적인 학원 문단에 도전하고 싶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한 달 남짓 공백기간이 있었다.


늘 가던 ‘O·K 이발관’에서 중학시절의 잔재인 머리털을 박박 밀어내었다. 이발의 클라이맥스는 ‘머리 씻기’인데 문경군수자리와도 못 바꿀 상콤한 쾌락이다. 내 이발한 기분을 하늘도 알아주는 양 눈발이 날려 테이프를 뿌려주었다.


상콩한 기세를 몰아 ‘재수 없던 날’이란 콩트를 일필휘지했다.


‘재수 없던 날’은 200자 원고지 10장 정도의 짧은 콩트였다. ‘구두닦이 소년의 하루’를 이야기에 담았는데,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해 고생(?)이 컸다.


구두닦이 소년의 도구함의 이름을 알지 못해 구두닦이소년을 ‘슈사인 보이’로 부르니 구두닦이 도구함을 즉석 명명하여 ‘슈사인박스’로 표기했지만, 내심 미흡한 게 마음이 개운하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슈사인박스’라는 것보다 ‘구두닦이 구두통’이라 하면 될 것이었다.


학우 서경수에게 원고정리를 부탁했더라면 ‘우수작’은 따논 당상일텐테, 졸필이고 난필이지만 이번만은 내가 직접 원고정리를 했다. 원고정리를 마치고 ‘학원’에 우송을 해야 하는데 등기요금도 없어 어머니가 우리 뒷집 아줌마에게 빌려 겨우 발송을 마쳤다.


석 달이 지난 후에 1957년 학원 6월호 학원문단 산문부에 가작으로 뽑혔다. 그때 입선이 됐던 동래중 이기태 학생은 뒷날 경찰청장(본청)이 되었고, 나와 같이 가작이 됐던 서울사범학교 이성훈 학생은 뒷날 소설가가 되었고, 보성중 조해룡(해일) 학생은 뒷날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하여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문명(文名)을 날리는 한국소설계의 주역이 되었다.


이렇듯 당시의 ‘학원문단’에 뽑힌 소년 문사들은 뒷날 한국 문단의 스타로 성장한 문인들이 수를 헬 수 없을 정도다.


후일 조사한 것을 한번 보니, ‘학원문단’에 이름이 올랐던 당시 중·고생이던 소년 문사들이 기성문인이 되어 1980년 문단에 140여명을 헤아렸는데 단 한 번의 ‘선외가작’으로 나도 140여명의 스타 중 한 명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고 하겠다.


너무 글씨를 못써, 투고할 때 많이 망설였지만 다행히 투고하여 가작 입선해서 나도 소년시절에도 단순한 맹물이 아님이 증명된 셈이다.


우표 살 돈도 없어, 눈물을 보여야 했던 지난날이었지만 문학이 있어서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취(흔적)다.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자’는 말을 가훈으로 삼아 노병(老兵)인 나도 오늘도 뛰고 있다. 인생은 영원히 달리는 도상(道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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