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은 곧 피카소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거장 피카소가 스페인 출신인지조차 몰랐다. 다만, ‘게르니카’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저 독특한 화법이 주는 선입견 때문에 엉터리 아니면 천재일거라는 단편적 생각이 전부였다. (사실은 전자에 더 가까운 생각을 했을지도.)
피카소에 관한 일정은 제법 알찬 코스로 짜여있었다. 그의 고향 ‘말라가’가 가장 먼저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가는 남부 안달루시아의 휴양 도시이다. 초겨울이었음에도 웃통을 벗어 던지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일 정도로 평화로운 해변이었다. 어린 날의 피카소도 이 바다와 태양이 주는 영감에 붓질로서 화답을 했으리라.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 물빛과 지중해 물빛은 다르단다. 코발트빛과 에머랄드빛의 차이라고 했던가. 나로서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동해안 호미곶 앞 바다나, 카보 다 로카에서 본 대서양이나, 말라가 해변의 지중해나 바다는 다만 바다일 뿐이었다. 아마, 청정 지역에서 관찰했을 때 그러한 차이점이 발견되는 모양이었다. 잠깐 둘러본 말라가 해변은 포항 바닷가에다 야자수 몇 그루를 옮겨다 놓은 것처럼 친숙하게 다가왔다. 다만 동해안보다 온화하고 포근해서 여성적인 느낌이 들었다.
해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피카소 생가가 있었다. 전시실에서 본 그의 유년기와 초창기의 그림 대부분은 사실풍의 화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부터 피카소가 난해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속으로 나는 ‘말라가의 진실’이라고 중얼거렸다.
아마, 그 발견은 개인적인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그저 호기심 때문에 그림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무료한 데생 과정이 끝나고 수채화를 그릴 때였다. 채색만 하면 내 그림은 기상천외한 기하학적 무늬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그 때 동료들은 ‘완전 피카소네!’라며 조롱섞인 위로를 보내곤 했다. 그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갖춘 뒤에 버려라.’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 욕심을 낸다는 뜻이었다. 그 때 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피카소 같은 이는 갖추지 않고 버리는 것부터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쩌다 통해 천재 소리 듣는 거겠지.
이러한 내 무지가 말라가에서 드러나 버렸다. 유년기의 피카소는 이미 대가의 경지를 넘어섰다. 월반을 거듭하고, 남들이 한달 걸릴 과제를 피카소는 하루에 거뜬히 해결했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가 피카소 앞에서 일찍이 붓을 꺾을 수밖에 없었을까. 갖춘 뒤에 버리는 과정이 곧 예술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절로 가슴을 후비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피카소의 버리기 과정 한 켠에 게르니카도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 천재성에 경외어린 눈 도장을 찍기 위해 모두들 게르니카를 보러 간다. 마드리드로 옮기는 도중에도 피카소 공부는 계속되었다. 임헌영 선생님의 사모이신 고경숙 선생님이 많은 공부를 해오셨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피카소 특강을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말라가를 떠나 바르셀로나에 정착할 때까지의 청색 시대와 청년기 이후의 장밋빛 시대, 다채로운 애정 행각이 곁들인 파리시절과 예술혼에 이르기까지 피카소의 여정이 꿈결처럼 이어졌다.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에서 게르니카를 보았다. 우선, 그 웅장한 규모 앞에서 놀란다. 그림은 거의 벽 한 면을 차지한다. 흑과 백의 조화가 섬뜩하리만큼 돋보였다.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깨진 칼자루를 쥐고 있는 병사와 이지러진 말과 황소의 표정들. 독재와 폭력에 항거하는 메시지가 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그것이 고통과 상처를 말하고자 한 것만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흑백의 드로잉이 전하는 저 단순하고 명쾌한 방식. 그것이야말로 ‘갖춘 뒤에 버리는 자’의 진정한 예술혼이었다. 천재는 왜 엉터리로 불릴 수 있는가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피카소의 천재성에 의문을 달고 싶은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말라가의 피카소를 먼저 둘러보라. 지중해의 태양이 선사한 그의 초창기 그림이 그 답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