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의 이 벌판을 언제나 다 지날꼬(遼野何時盡), 열흘을 와도와도 산 하나 안 보이네(一旬不見山), 새벽별 말머리를 스치어 날아 가고(曉星飛馬首)/아침 해 밭 사이서 돋아 올라오네(朝日出田間)」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이 남긴 시와 소설 등을 따로 뽑아 한글로 번역한 시문집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가 지난연말 출간됐다.
위의 시는 조선 정조 때 사절단으로 중국 청나라의 리허(熱河)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 오는 길에 쓴 `요동벌의 새벽길 (遼野曉行)'이다.
연암은 스스로 `껄껄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진보적 실학자이면서 따뜻하고 소박하게 살다간 연암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는 별명이다.
그의 북학의(北學議) 녹제(祿制)에는 "지방 관원은 녹봉이 없어서 혹 현령이나 현감으로서 목사(牧使)보다 수입이 십배나 넘는 자가 있었으니 어찌 옳은 이치인가. 한번 수령자리를 얻으면 자손만대의 기업(基業)을 장만한 다음에야 그만둔다, 매직하는 풍토가 날로 일어나고 상민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니 이것은 실로 사세(事勢)다"며 녹봉의 현실화를 주창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중국은 비록 9품직에 들지 못한 관리라도 녹봉이 우리나라의 대신보다 많다. 그러나 백 꾸러기 이상의 재물을 모은 자는 '국가의 재물을 축낸 자를 다스리는 법'을 적용했으니 이것이 지극히 정당 공평한 방법이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문집 중, 농업을 살리기 위해 부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글에는 시대를 앞서간 연암의 모습을, 아전들이 빼돌린 곡식을 채워넣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자기 녹봉을 헐어 먹이는 모습에서는 `어진 사람' 박지원을 만날 수 있다.
연암의 녹봉 현실화는 소비를 권장해 생산을 자극하자는 실용주의 철학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 ‘녹봉의 현실화’는 예나 지금이나 희망 그 자체였다.
가톨릭 종합매스컴인 평화방송·평화신문이 올해부터 급여 지급방식을 은행자동이체에서 `현금봉투' 방식으로 변경했다.
평화방송이 급여지급방식을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바꾼 이유는 한 집안의 가장이 땀 흘려 일한 대가를 `월급봉투'에 담아 전달해줌으로써 가족들이 가장의 역할을 되새겨보며 피부로 가장의 고마움을 직접 느껴보게 하자는 것이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시대 가장들의 권력은 ‘월급봉투’에서 나왔다.
비록 얇은 월급봉투였지만 그 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고이 넣은 날에는 ‘위풍당당’ 호기를 부려본 기억이 나이 든 분들께는 다 있을 것이다.
“아빠 힘내세요”란 노래가 유행처럼 번지는 어렵고 힘든 요즘, 그 월급봉투에는 한 가장의 가족사랑, 땀과 노력의 아픔과 희암이 베어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바뀌지않은 가치, 노동의 참뜻이 그 봉투에 담겨 있는 것이다.
동국제강이 최근 포항제강소에서 가진 신입사원 가족 초청 간담회에서 한 신입사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크게 기뼜던 적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우리 동철이가 태어날 때 기뼜고, 다른 한번은 이 놈이 잘 성장해서 훌륭한 회사에 입사해 줘서 장하고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다"라고.
아버지의 그 말에는 ‘바늘구멍’같은 취업난속에서도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첫 출발하는 아들, 그리고 나아가 한 가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 짊어져야 하는 아들에게 당부하는 ‘월급봉투의 참미학'이 스며 있을 것이다.
<이창형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