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그 길밖엔 없어 <Ⅷ>

등록일 2022-08-29 19:36 게재일 2022-08-30 17면
스크랩버튼
김강 연재소설 ‘Grasp reflex’
/삽화 이건욱

세 번째 만남의 기간은 앞선 두 번 보다 짧았다. 안나가 만식의 상주 트레이너가 되어 만식의 집에 들어가면서 그들의 만남은 끝났다. 우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

우현이 말했다.

-아니, 살림을 살러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돈 많은 부자의 개인 트레이너가 되는 것일 뿐이야. 방 내주고 밥 먹여주고, 돈도 준다는 데 왜 안 된다는 거야? 남는 시간은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확인도 받았다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구십이 다 돼가는 노인네야. 무슨 걱정이야?

조금만 더 세게 나가면 안나가 포기할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지금 결정해. 상주 트레이너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든지 나를 포기하든지.

우현의 말에 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오빠는 여전하구나. 바뀐 게 아니었네. 내 인생이라고. 분명히 말했지. 오빠가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어디에 뭘 가져다 붙이는 거야. 결정할게. 지금으로선 오빠를 포기할 수밖에 없네.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감옥 생활에 적응하느라 견딜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사업에 몰두하느라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매일 안나의 얼굴이 떠올랐고,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던 것인지.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건지. 안나는 우현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에 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결국 우현은 노마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노마에게 그동안의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안나와 다시 만날 수 있게 주선해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웬일이냐? 사업은 잘되고?

오랜만에 만난 노마였다.

-사업은 뭐. 그냥 그렇지.

우현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소리. 나도 다 듣는 소리가 있거든. 아이고, 부러워라. 나는 월급쟁이에, 집안 꼴도 말이 아니고. 오늘 네가 쏘는 거지? 나 비싼 거 먹어도 되지?

메뉴판을 살피며 안주를 고르는 노마에게 우현이 물었다.

-집안이 뭐? 무슨 일 있어?

안주를 고르던 노마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이거 부끄러워서 어디에 말도 못하겠고. 그래도 네 녀석은 우리 집을 좀 아니까. 글쎄 안나가, 안나라는 녀석이 말이야.

-안나가 뭐? 말해봐.

-그 녀석이 마이걸이 되었다, 마이걸이. 안 되겠다, 오늘 소주 먹자. 소주

노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우현은 숨을 멈췄다. 마이걸이라니. 상주 트레이너라고 했는데.

-상주 트레이너 아니었어? 그러면 그 팔십 넘은 노인의 마이걸이 되었단 말이야?

-글쎄 그렇다니까. 어, 그런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노마가 우현에게 물었고 이번에는 우현이 한숨을 쉬었다. 노마는 우현의 움켜쥔 주먹을 보았다.

-니들 둘, 혹시?

그날 우현은 노마에게 안나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근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다. 우현, 네가 어떻게 나를 속일 수 있냐. 내 동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 노마가 화를 내며 우현에게 따졌지만 분노와 섭섭함, 배신감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때 도움을 청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바로 결혼이라도 시켜버렸을 것 아니냐.

노마가 우현에게 말했다.

-안나가 조금 더 있다 말하자 그랬어. 그리고 그때는 나도 자신이 없었고. 네가 항상 말했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네가 아는 수컷에게는 안나를 시집보내지 않을 거라고. 너하고 절교를 해야 안나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친구들한테 말하고 다닌 것 기억 안 나냐?

우현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고 노마는 우현의 잔에 소주를 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 녀석을 어째?

-아버지는 뭐래? 가만히 있으셨어? 어머니는?

우현이 물었다.

-삶에 정답은 없단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이란다. 잘 모셔라, 그러더라.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이냐.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이라니. 네가 오빠냐?

노마의 대답에 우현이 화를 냈다.

-이 녀석이 왜 나한테 이래. 내가 그랬어? 듣고 보니 네 녀석이 안나 간수를 잘 못한 거네. 어쩔 거야? 응? 내 동생 어쩔 거냐고?

안주로 시킨 두부김치가 나왔지만 둘 중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고 술잔만 비워댔다. 번갈아 가며 마시고 따랐다. 세 병째 소주를 주문했을 때 우현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죽여 버릴 거야. 이 노인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다 늙어가지고 뭐하는 짓이야.

급하게 마신 탓에 술기운이 오른 노마가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의 얼굴은 타는 듯 붉었다.

-말로만. 안나 하나 붙잡지 못하면서 사람을 죽인다고? 인마, 네가 아무리 인공 장기 팔아먹고 다니지만 사람 죽인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 인마.

노마가 물 잔에 소주를 따라서 우현에게 건넸다. 우현은 물 잔을 들어 단번에 비웠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못 할 것 같지? 나 잘해. 장기 떼고 붙이는 것, 웬만한 의사보다는 나을 걸. 내가 다 가르치잖아, 의사들.

-그러면, 너 진짜로 죽일 수 있어?

쉰 소리와 허풍, 비아냥거림, 울음으로 그날 술자리는 끝났다. /김강 소설가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