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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역사 이야기> &#34;고대 신라 생활·경제상 한 눈에 펼쳐져&#34;

황태진 기자
등록일 2006-06-30 17:22 게재일 200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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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진 포항향토사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이 성읍국가에서 출발하여 고대국가인 신라로 발돋음 하여(德業日新 網羅四方) 4방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갈 때 북쪽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가 바로 포항시 북구 신광면이다.

이러한 신광의 유적·유물을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곳이 냉수리(冷水里)이다.

많이 없어지고 5기만 남아 있는 고인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를 새로 쓰게 한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가 냉수초등학교 옆 차평(車坪)들의 못밑등대 밭에서 발견되었고, 925번 지방도로 확장공사 도중에 발견한 냉수리 고분, 냉수리 서편 흥곡리 고분군(86기)과 마조부락에서 출토된 ‘진솔선예백장’ 동인(보물 560호) 등이 바로 이곳에서 발견됨으로 고고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였다.

# 냉수리 고분

기계-신광 간 925번 지방도로 확장공사 중 발견되어 1990년 10월부터 1992년 6월까지 2년간 3차에 걸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고분은 용천 저수지(일명 냉수못)가에 있는데 못의 좌우측 해발 50~100m 안팎의 능선과 등성이에는 크고 작은 봉토분(封土墳)이 떼를 이루고 있다.

1991년 경주 문화재연구소에서 냉수리 일대 지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모두 8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이 굴식 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이며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 石槨墳)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이 고분은 이미 도굴되어 6.25전쟁 때에는 방공호로 사용된 적도 있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나 6세기 전반기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한강 이남에서 발굴 조사된 굴식 돌방무덤으로는 최대의 규모이고(무덤 전체지름 2500cm, 돌방의 길이 610cm, 폭 350cm, 높이 290cm), 널길에 부장용 곁방(側室)을 둔 독특한 구조와 널방의 벽면을 쌓아올린 축조기술과 회(灰)를 발라 벽면을 곱게 미장한 점 등에서 고구려 석실고분과의 관련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흩어져 남아 있는 유물들 ‘관(冠)파편, 영락(瓔珞·관장식 치레), 금제 반지, 은제 허리띠, 구슬장식 칼 손잡이, 말 장식, 토기류’등을 살펴 볼 때 이 고분의 주인공은 이 일대의 수장층(首長層)으로 경주세력과 연관성을 갖는 고구려계 이주 세력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며 경주지역 돌방 무덤문화의 유입경로로 제시되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 지역 고분군들의 존재는 이곳이 삼국시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가 동해안과 북쪽 산악지대로 진출하는 길목인 요충이었음과 함께 이 고분군을 이룬 집단들이 일찍이 신라에 복속되면서 신라 세력 확장의 교두보 구실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 흥곡리 고분

냉수리 용천저수지 건너편 마조마을로 들어가는 길 좌우 구릉에 수 십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대부분 도굴 당한 흔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중에는 길이 6m가 넘는 돌방(石室)을 갖춘 대형 굴식 돌방무덤도 보인다.

특히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동예(東濊) 군장(君長)의 동제(銅製) 도장으로 나오는 ‘진솔선예백장’동인도 이 마을에서 발견되어 고고학적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伯長) 동인 (보물 560호·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 소장) 은 1966년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현 흥곡리)에서 권오술씨의 외양간 정지작업 중에 파란색 유리옥 10여개와 함께 출토된 구리로 만든 인장(印章)이다.

크기는 전체높이 2.7cm, 인장의 폭 2.4cm 이고 손잡이에는 해태로 추정되는 짐승이 4다리를 밑에 붙이고 허리가 공간이 된 형태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있으나 몸통에는 짧은 가로선(橫線)이 있을 뿐 녹으로 인하여 분명치 않다.

도장 면은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伯長)’이라고 한 줄에 상하 2자씩, 세줄 총 6자의 글자가 예체(隸體)로 음각되어 있다. 도장면 주변에 손상이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중국 한나라 때 이래로 주변 사린(四隣)의 제국(諸國)의 장에게 준 관인(官印)의 하나로서 진대(晉代)에 예백장(穢伯長)에게 준 동인으로 추정되어 ‘진솔선호백장 (晉率善胡伯長)’ 인장과는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이러한 예는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무덤 출토된 ‘부조예군 (夫租穢君)’ 은제(銀製) 도장과도 양식상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이 인장은 예(穢) 또는 숙신(肅愼)으로 불리었던 예족계 족속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였음을 증명하는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단서로 제공된다.

# 냉수리 신라비

1989년 4월 6일 냉수리 차평들 동쪽 이상운씨 밭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 신라시대의 비석이다.

크기는 앞면 아래의 너비 73㎝, 왼쪽높이 47㎝, 오른쪽 높이 66㎝, 두께 30㎝의 부정형 육각형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폭이 약간 줄어든다. 앞면에 12줄 152자, 뒷면에 7줄 59자, 윗면에 5줄 20자 등 모두 231자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글씨는 꾸밈없고 소박하며 고졸한 맛이 가득한 고예체(古隸體)였다.

비문에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는데 癸未년 9월 25일에 지증왕 등 각부의 대표 7명이 함께 논의하여 두 왕의 조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다음 별교(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죽은 후에는 아우 아사노(兒斯奴) 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斯奴)에게 재산이 상속되고 미추(未鄒), 사신지(斯申支)는 재물 분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중죄에 처할 것임을 결정하였고 이 명령은 중앙기관의 전사인(典事人) 7명과 지방관서의 촌주(村主) 2명이 일을 마치고 이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계미(癸未)라는 간지와 지증왕 등 각 칭호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신라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비는 5~6세기 신라의 경제사, 법제사,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용어와 내용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으며, 이두의 성립시기와 발전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여 여러 분야에 가치 있는 금석문이다.

이런 연유로 비는 곧바로 국보 264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의 중앙 박물관, 경주 박물관, 흥해 박물관 등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소장을 주장하여 쟁탈이 치열하였는데, 모든 금석문은 가급적 발견 현장에 보존하는 것이 원칙이나 냉수리 현지가 보관상 적합치 않음으로 현재 신광 면사무소 마당에 비각을 짓고 그 안에 보존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이상과 같은 여러 사실, 즉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유적들은 차치하더라도 3~4세기경 예맥족의 이동 단서가 되는 ‘진솔선예백장 (晉率善穢伯長)’동인, 5세기 말 신라의 정치·경제·사회적 분쟁을 처리한 냉수리 신라비, 6세기대의 고구려계통의 대규모 떼무덤인 냉수리·흥곡리 고분군 등을 고찰해 보았을 때 역사의 퍼즐처럼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으니

‘그때 냉수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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