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작은 모임이 많은 나라다. 학연에 따른 동창회가 많고 일정 기간 군 생활을 같이 했다고 전우회가 있고 같은 성씨끼리의 종친회를 조직한다. 동창회도 총동창회, 동기 동창회, 반창 회까지 있고, 종친회도 대종회와 중시조 종친회, 파 종친회까지 있다. 같은 직장의 친목회, 각종 종교인끼리의 소모임까지 합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인정이 많아 이러한 친목 모임을 많이 만드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어 이나라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민주정치의 발달을 의회 정치나 정당 정치발전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 정치는 쉽게 변화되거나 발전되기 어렵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가 되면 공약을 남발하고, 선진 정치 구현을 요란하게 외치지지만 그것이 답보하는 것은 기성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 문화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모임에서나 회비 내고 식사하면서 담소 하다가 담론의 범주는 방향도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구성원들의 참여기회가 균등한 토론문화가 제대로 정착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모임에는 소수 유력인사가 이야기를 독점하는 구조가 아직도 온존하고 있다. 내가 자주 참여했던 어느 친목회에서도 항상 어느 한분이 이야기를 독점하여 불쾌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종친회 역시 항렬이 높거나 입담 좋은 종친의 주장이 독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창회 역시 마찬 가지이다. 여기에 말 없는 다수는 소외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관행이 굳어진 곳에 모임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다.
흔히들 친목성격의 소 모임에는 토론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나라의 각종 모임에서부터 건전한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고서는 민주 정치가 성숙할 수 없다. 특히 지역 연고주의가 판을 치는 대구 경북과 광주 전남지역의 소모임에서는 지지하는 정당의 논리에 배치되는 주장은 완전히 이단시 되고 배척된다. 일당 독점의 연고주의 정치의 뿌리는 이러한 소모임의 왜곡된 토론 문화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전 어느 모임에서도 어떤 이의 진보적인 주장이 종북 좌파로 매도되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장면을 목도한 적이 있다. 소수 몇 사람의 주장이 분위기를 좌지우지하고 다수가 침묵하는 모임에서 참여적 정치 문화는 착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려면 우리의 소모임부터 건전한 토론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한 나라의 정치 발전 수준은 그 나라의 정치 문화 수준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친목 모임일지라도 회장이나 총무는 참여자들이 자기의 근황이나 어떤 사안에 관하여 1~2분만이라도 발표할 기회를 골고루 줄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참여자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 받을 수 있어 회의 참석의 의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모임의 회장은 특정 주제를 정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주제로서 정치나 종교 문제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민주적인 토론문화가 성숙되지 못한 우리의 풍토에서는 의견의 차이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독일 학술 여행 시 사적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사적 모임이지만 진지하게 대화하는 그들의 활발한 토론 문화가 부럽기까지 하였다. 독일이 통일 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는 독일 통일이 잘못되었다는 극좌파의 주장까지 경청하고 있어 놀라고 말았다. 이러한 진지한 토론문화가 오늘의 발전된 EU 중심국 독일의 성장판 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독일의 소모임에서의 진지한 토론 문화가 위대한 철학자 칸트를 배출하고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논리의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