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경제위기로 불안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이 시대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는 40대 일꾼들이 실직불안에 휩싸여있다.
사회는 일자리나누기로 그들을 보듬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한계가 있어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요즘 노동의 상징인 ‘워낭’을 달고 주인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40년을 살고 간 소 얘기가 세간의 이목을 끈다.
‘워낭소리’ 같은 영화 속의 장면이 예전 같으면 무심코 지나칠 광경인데도 이제 스크린을 통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니 격세지감도 든다. 그래도 이런 ‘아름다운 동행’을 담은 얘기들이 이 시간의 아픔을 달래줄 큰 힘이 되리라 여겨진다.
세상을 보는 시각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처지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이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보면서 40대 이상은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회상했을 것이고 도시의 젊은이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장면이지만 동행의 미래를 연상했을 것이다.
어린이가 보았다면 그저 지루하기만 한 늙은 농부와 소의 산골생활을 담은 영상이 PC게임보다 재미없다는 생각만 들 것 같다.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도시 사람이라면 복잡한 삶의 굴레에서 쳇바퀴 도는 생활을 벗어나 느긋하게 자연을 벗하며 늙어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도 할 게다.
반면에 시골에서 땀과 눈물로 젖은 밥을 먹어본 사람들에게 ‘워낭’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대물림으로 이어질 가난한 삶에 대한 경종으로 다가와 한숨도 지을 것이다.
더욱이 실직공포에 떨고 있는 40대가 산골에서 소 팔러 굴러가는 달구지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아 고개를 체머리 흔들 듯 저절로 절레절레 흔들어 댈 것 같다.
소는 노동력을 상실하고 죽음에 이르러 ‘워낭’을 벗는다. 만약 직장을 잃은 40대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이것저것 다 정리하고 당장 워낭소리 들으며 살고도 싶어질 게다.
그런데 살던 곳을 떠나 새롭게 정착할 곳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 몰고 농사짓는 일이 어디 쉬운가. 말만 들었지 어디 소에게 먹일 꼴이라도 한번 베어 보았는가.
그동안 부모가 시골에서 등골 빠지게 일한 덕택에 도회지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부만 했었지 않았는가. 이래저래 생각을 굴리다 보면 이제까지 몸담은 직장을 떠나서 다른 곳을 찾아볼 엄두도 못 내고 처자식 데리고 부모의 고생이 보잘것없이 돼버린 처지가 한없이 서글퍼진다.
이 순간 묵묵히 워낭소리 울리며 죽을 때까지 주인과 함께 한 소가 부러워진다. 그리고 긴 세월을 한결 주인으로서 소를 지켜준 늙은 농부가 우러러 보인다.
가진 자가 추억을 더듬는 것은 여유지만 못 가진 자의 추억은 때로는 고통이다. 40대의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바라보는 소달구지는 한가하고 평온한 흔들거림보다 가난에 대한 염려를 가득 싣고 삐걱거리는 소리만 크게 울릴 것 같다.
그냥 세상살이가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잠시 위안도 되지만 마주친 현실에서 삶의 무게가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가릴 것도 없이 가진 자의 여유를 나눠 갖고도 싶어진다.
시대상황으로 불혹의 40대가 불안한 40대가 되고 있다.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에 잠기는 게 인간이기에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향한 갈증에 목이 타지만 점점 늘어가는 나이와 말라 가는 형편으로 걱정만 늘고 있다. 하지만 늦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다.
누가 “삶의 성공비결은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40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그동안 노동의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으로 든 것은 많다. 궁하면 통한다 했으니 기회는 구하는 자의 것이다.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모두가 ‘워낭소리’ 얘기처럼 ‘아름다운 동행’을 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러니 힘내라 40대! 그대들을 이 땅의 ‘불사조(불혹의 사십대 조기회복)’라 부르고 싶다. 불사조(不死鳥)처럼 다시 살아나 훨훨 날 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