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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쳐 나라 구한 老兵들에 합당한 예우를”

안병욱기자
등록일 2024-06-24 20:08 게재일 2024-06-2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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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4주년… 6·25 참전용사 이규석 옹 인터뷰
지난 17일 6·25 참전용사 이규석 옹이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안병욱기자

◇ 20살 나이에 만난 전쟁의 참상

“목숨 바쳐 나라 구한 참전 군인들을 잘 예우해줬으면 좋겠어.”

6·25 참전용사 이규석(92)옹.

구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예사롭지 않았다.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청춘과 애국의 열정으로 의거를 일으켰던 1932년에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이옹. 그는 어머니를 15살 때 잃었다. 장남이었기에 일찍 철이 들었고 4명의 동생과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열여덟 살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아내는 한 살이 적었다.

살림은 아내에게 맡기고 농사일을 시작했다. 막내 동생이 당시 5살. 이규석 옹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랬기에 동생들은 대구, 김천, 대전, 천안으로 흩어졌다.

이옹이 성주에서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즈음,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전쟁이 났다고 했지만 실상 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새 인민군들은 노도와 같이 몰려왔다. 서울을 넘어 부산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경주, 영천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이규석 옹은 다른 이들과 함께 잠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해 8월 북한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전세가 뒤바뀐 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였다. 서울을 수복하고 두만강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으로 1·4후퇴가 일어났고 이후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소규모 전투가 끊임없이 전개됐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됐지만 해를 넘긴 1952년 8월까지 능선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투에 의한 퇴각과 탈환이 무한 반복됐다.

이규석 옹이 한국전에 징집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당시엔 날짜를 서기가 아니라 단기로 계산했지. 단기 4286년(서기 1952년) 8월 12일, 스물 둘에 징집을 당해 제주도로 입대했어. 전쟁 중에 군대를 가야한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었지만, 당시엔 어째선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도 다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없다고 스스로를 격려했지.”

다만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들었다. 이옹은 아직도 자신이 소속된 1연대 17중대 3소대를 기억한다. 입대 이후 임시 훈련을 마치고, 그 해 12월 제주도에서 배에 올라 속초로 갔다.

“배를 타고 가는 중에 폭풍우를 만났어. 비바람이 너무 거세서 배 안에서 닷새 동안 꼼짝도 못하고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그렇게 속초에 도착하니 우리 중 반 정도는 다 널브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했지.”

국군 지휘부는 기진맥진해 병력으로 쓸 수 있을지조차 판단이 어려운 젊은이들을 모아 다시 강원도 양구로 이동시켰다.

1개 중대 135명 전투 투입되면

겨우 40~50명만 살아 돌아와

한꺼번에 화장된 전우들 유골

조금씩 나눠 담아 집으로 보내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 없어

윗세대에 고마운 마음 가져야

◇ 통신병 근무하며 유골 수습하기도

당시 연병장에서 다다르니 대졸, 대퇴, 고졸, 고퇴, 중졸, 중퇴, 소(소학교·초등학교)졸, 무학 순으로 쭉 불러가며 구분해 20사단을 창설했다. 이옹은 학교를 다녀보지도 못해 소졸, 무학을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61연대 3대대에 배치가 됐다. 중대 배치를 받고 특기를 정할 때도 어디에 줄을 서야할 지 망설였다. 끝까지 가만히 있었던 그는 본부중대 통신병으로 뽑혔다.

“통신병이 뭐하는 건지도 모르고 근무를 시작했어. 하다 보니 전투 중에 가설을 하거나 무전을 연결하러 참호를 왔다 갔다 하는 역할이더군. 그러다보니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흔했어.” 전투병들은 초소에서 싸우거나 돌격하지만, 통신병들은 지역을 막론하고 전선이 끊어졌다하면 그곳이 어디든 뛰어가 수리하면서 이동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널브러진 전우의 시신도 수없이 봤다. 시신은 장소를 기억해 두었다가 전투가 잦아들면 수습, 유골은 화장을 해 유골함에 담아 유족들에게 보냈다. 전방에서는 국군과 북한군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시체를 한 구씩 제대로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전투 중 확인된 아군들의 시신을 수습, 한꺼번에 화장을 했다. 1개 중대 135명이 전투에 투입되면 살아나오는 게 겨우 40~50명 정도 뿐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전사통지서와 함께 유골함을 보낼 때는 공동으로 화장한 유골을 조금씩 나눠 담아 이름을 붙여 보냈다. 그 일도 워낙 죽어나가는 병사가 많아 결코 쉽지 않았다.

1952년 제주도 훈련소 1연대 17중대 3소대 입소 당시 모습. 이규석 옹은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 훈련소에 입소했다.
1952년 제주도 훈련소 1연대 17중대 3소대 입소 당시 모습. 이규석 옹은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 훈련소에 입소했다.

“고향에서 같이 입대한 사람이 있었는데 사단은 같았지만, 연대가 달라 교류가 없었어. 그 사람이 죽었다고 고향에서 집안 어른이 나를 찾아왔더군. 통지서를 받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소식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입대 이후엔 부대가 달라 왜 죽었는지,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전사자도 수천 명이나 되어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내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 그랬더니 ‘아이고~ 아이고~’라며 슬퍼하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포탄이 떨어진 곳서 구사일생

전쟁터는 삶과 죽음이 늘 교차하는 곳이었다. 오성산을 두고 서로 뺏기지 않기 위해 남과 북이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당시 북한군은 높은 고지를 점령한 상태였고, 국군은 오성산을 빼앗기 위해 수천 명이 참호 안에서 위장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밤에 적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참호가 무너졌고 옆에 있던 전우들은 팔다리가 찢겨져 나가면서 목숨을 잃었다.

“운명이란 참 모를 일이야. 함께 있던 사람은 죽었는데 산 이도 있으니까. 난 그때 산 뒤쪽에 있는 참호 구석에 있었는데 용케도 파편 피해를 입지 않아 살았고, 황해도에서 온 동기는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통로에 바짝 엎드렸기에 살았어. 부상자들은 육군병원으로 이송됐지.”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중대원 11명 중 9명이 죽고 2명만 살아남았다. 후송열차를 타고 대전쯤을 지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근처에 온다는 소식이 있었다. 민간인들은 ‘휴전 반대’를 외치며 현수막을 걸고 야단이었다. 

“휴전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화가 났어. ‘이놈들아, 전방에서 사람 죽는 줄 모르고 여기서 휴전에 반대해? 그러면 안 돼. 너희들이 전선에서 하룻밤만 견뎌봐라.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말했지. 삶과 죽음이 순간순간 바뀌는 비정한 전장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았어. 제대하고 성주에 있는 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은 하나도 없고 아내 혼자 살고 있었어. 그래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내가 전부 한 군데 다 모았지. 가진 것 없지만 흩어지지 말고 살자고 했지. 이후 동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나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려운 형편에도 모두 대학까지 보냈어.”

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또 긴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6·25전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있다. 돌아보면 한국전쟁은 이규석 옹 삶의 뿌리를 바꾼 화인(火印)이었다. 이 옹은 아직도 간혹 6·25 전투 꿈을 꾸곤 한다. 평생 짊어져 온 멍에다. 이 옹은 참전 용사들을 대하는 그간의 정부 시책에 아쉬움을 내비쳤다. 특히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행위가 행정서류 하나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허탈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전방에 가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 중 지금 남아있는 이들은 아마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을 거야. 그 생존자 중 지금 속상한 경우가 많아.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켰는데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훈장도 하나 받지 못했다는 것이지. 생각해보라고. 전쟁터에도 안 가보고 후방에 있던 사람도 무슨 훈장 받고 그러는데, 정작 전투 현장을 치열하게 겪은 사람들은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되지 않으니 속상하는 거지. 기록증이 있는데도 병무청에 가면 전쟁 당시 상황이 전산 상에서 누락돼 안된다고 한데. 힘든 일이긴 하겠지만, 정부가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참전 전투 용사들을 전수 조사해서 명예를 좀 찾아줬으면 해. 조국과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불살랐다고 자랑 하고 이 세상 하직 할 수 있도록 말야”

1954년 김화 오성산 호 앞에서 행정병, 사무지원병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아래가 이규석 옹.
1954년 김화 오성산 호 앞에서 행정병, 사무지원병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아래가 이규석 옹.

◇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우를 원해요”

시간이 흘러 이 옹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군대를 거쳤다. 이 옹은 간혹 자녀들에게 “너는 군대생활을 어떻게 했노”라고 묻는다. 그러면 한결같이 “고생 신나게 했다”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 옹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 군대생활은 학교 댕기는 거랑 마찬가지다. 너네는 행복한 인생들이야”라며 웃는다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인생을 뒤흔든 참혹하고 충격적인 체험이었지만, 전쟁을 영화나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한 이들에겐 이 옹의 하소연이 그저 재미없는 옛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겪으며 고통 받았어. 이제 그 사람들이 내 또래들밖에 없어. 젊은이들은 전쟁을 겪지 않았지. 그런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준 윗세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잘 모셔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해. 한때는 통일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여동생에 딸까지 동원해 체제를 유지하려는 북한 모습을 보면 과연 통일이 이루어질까 의문이 들기도 해”

전쟁이 지나간 지 벌써 74년.

이제 당시 태어난 사람조차 황혼으로 저무는 나이가 됐다. 그 새 한국은 인구 5000만 이상 국가 중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잘사는 나라 반열에 올랐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길이었고 결과다. 그래서일까. 이규석 옹은 지금 젊은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과도 맥이 닿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전쟁 당시 참화를 잊지 말라는 것도 담겨 있을 터다. 이제는 노병으로 늙어버린 참전용사들. 우리가 그분들에게 예우를 갖춰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의 그 숭고한 희생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으니까.

/안병욱기자 eric4004@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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