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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딱한 실정 뼈저리게 느끼니 - 구휼과 교육에 앞장서다, 장홍모 여사

경주 외동의 괘릉초등학교 운동장 양지바른 곳에 빗돌 하나가 서있다. 우뚝 선 돌엔 ‘아산 장씨 홍모여사 시혜 불망비’라는 비명이 선명하다. 정문 노거수 아래 잡초와 덤불에 묻혀 있던 것을 단장해 현재 장소로 옮겼다. 뒷면 비석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 어린이가 멀고 위험한 곳을 눈비와 추위에도 지칠 줄 모르고 오늘도 늦을세라 종종 걸음 치면서 학교에 다니던 그 딱한 실정을 뼈저리게 느끼시고 교사 일동과 부지를 기꺼이 희사하시어….’ 학교 부지와 본관동을 희사한 장홍모 여사의 덕을 기려 1965년에 주민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뜻있게 살다간 여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안, 이 학교 박정재 교장선생님의 초대로 장홍모 여사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여사가 기거했던 종가 수봉정도 함께 둘러보게 되었다.장홍모 여사 생전 모습.장홍모 여사(1890-1968)는 수봉 이규인(秀峯 李圭寅) 선생의 손부이다. 경주 유금의 아산 장씨 가문에서 괘릉에 터전을 잡은 명문 수봉가로 출가했다. 일제강점기를 건너던 수봉 선생의 철학은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니라 부의 축적을 통한 사회 환원에 있었다. 이용후생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의식주가 해결된 이상의 것은 내 것이 아니다’는 신념으로 이웃과 겨레에 도움이 되는 삶을 추구했다. ‘이수봉정’(李秀峯亭)이라는 재단을 설립해 빈민구제와 의료 사업에 힘썼고, 밖으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교육 사업에 매진했다. 수봉 선생은 홍모 여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했다. 홍모 여사가 수봉가의 안살림을 이어받았을 때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학교 뒤쪽 언덕 너머 들 한가운데에 기품 서린 저택이 보였다. 수봉정 안채에 들러 선생의 6대손인 젊은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어린 딸을 넓은 자연 품에서 키우고 싶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종가댁으로 들어왔단다. 수봉정은 학당과 의국으로 이루어진 수봉정과 사저로 구분되어 있다. 사저 회랑 입구에는 잠시 수봉정에 머물렀다던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들었다는 돌이 보이고, 무해산방과 열락당이란 사랑채가 차례로 보인다. 이곳 사랑채에서 수봉 선생은 가난한 이를 구제하고, 의료 혜택을 구상하고, 독립운동 자금 후원을 실천했다. 그 너머가 수봉 선생을 모시며 홍모 여사가 살림을 꾸려나간 안채이다.당시 일제의 수탈로 배고픈 과객들이 넘쳐났다. 당시 수봉가를 드나들던 객들은 하루 평균 오십여 명이었다. 과객과 상주객 그리고 집안 식구들, 그 많은 입들의 하루 세 끼를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한 사람이 홍모 여사였다. 여사의 숨결과 손때가 가장 많이 배었을 곳간채에 자연스레 눈길이 머물렀다. 이 곳 말고도 서너 채의 곳간이 더 있었다고 하니 살림 규모와 구휼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 장만처와 객들의 기거처를 분주히 오갔을 홍모 여사와 집안 여성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수봉정 옆 고샅길을 따라 기와집들이 나란하다. 한때 수봉가가 친족을 이뤄 살던 곳이란다. 정원을 잘 가꾼 한 집으로 들어간다. 코가 크고 혈색이 좋은 이상돈 어르신 역시 수봉가의 후손으로 홍모 여사의 시종조카라고 했다. 홍모 여사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느냐고 여쭈었다. 큰 키와 수려한 용모를 지닌 여장부에다 역사에 밝은 독서가였다고 한다. 객들이 들어찰 때는 쌀 몇 가마니, 소다리 몇 개씩을 찢어 곳간 하나를 내주며 직접 해먹으라고 할 만큼 통이 큰 분이셨단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를 낳았을 때 ‘코쟁이가 어린 코쟁이를 낳았네’하시며 미역꾸러미를 내놓던 일이란다. 추억과 회한에 젖은 어르신은 몇 번이나 울먹거리신다.김살로메 소설가수봉가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가 교육사업이었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면서 경주중학교를 설립한 수봉 선생은 끝내 개교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삼 년 간 병구완을 하던 홍모 여사가 개교를 지켜본 셈인데, 이때 벌써 육영정신이 계승되었을 것이다. 괘릉에 초등학교가 없어 먼 길을 다녀야한다는 것을 안타까이 여긴 홍모 여사는 기꺼이 학교 부지와 교사동을 희사했던 것이다.현재 괘릉초등학교는 장홍모 여사 관련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사의 캐릭터를 공모해 제작에 들어갔고 그에 관한 여러 스토리텔링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홍모 여사의 정신이 동심에도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수봉 선생을 도와 가난한 주변을 돌보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교육 사업에 앞장선 홍모 여사의 활동이 심도 있는 학술서로 재조명되기를 바라면서 괘릉 마을을 떠나왔다.

2021-02-17

앵무를 찾아서 - 의기(義妓)의 표본 염농산

염농산(廉嚨山·1859~1946) 여사는 구한말 대구·경북에서 활동한 애국 사회운동가이다. 경상감영의 행수기생 출신인 농산은 ‘앵무’라는 기명으로 활동했다. 한학과 시뿐만 아니라 가무에도 능했다. 이태백의 시에 등장하는 앵무와 농산을 이름으로 삼은 것만 봐도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임을 알 수 있다.앵무 여사가 주목 받게 된 것은 국채보상운동 덕분이다. 1917년 2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의연 활동을 한 여성이 앵무였다. 기생은 돈을 좇을 게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먼저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평소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앵무는 100환을 먼저 기부했다. “여력에 따라 의연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다.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는 없으니 누구든지 1천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한다.” 앵무 여사의 담대한 기개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김광제 등의 각성으로 이어졌고, 전국민을 분발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지에서 고종황제에 이르기까지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앵무 여사 같은 솔선수범하는 여성들의 기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생들의 연합인 달성 권번의 대표자로서 기생들을 규합하여 공연회를 개최해 구제활동에 쓰거나 민족운동 후원에도 적극 참여했다.염농산 여사의 흔적이 직접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여사를 기리는 빗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성주 나들이를 했다.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빛바랜 비석은 허술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비석과 바로 이웃한 홍영기(81세) 옹을 만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홍수 피해에 시달린 마을 전답을 앵무 여사가 사재를 털어 방천을 축조한 뒤 학춤을 췄다고 한다. 그 공덕을 기리고자 마을에서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석은 ‘앵무빗돌’, 방천은 ‘앵무방천’, 논밭은 ‘앵무들’로 불렸지만 이제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단다.대구의 기생이었던 앵무 여사가 하필이면 성주까지 가서 그 큰 토목공사 비용까지 댔을까. 이문기 교수의 ‘대구 의기 염농산의 생애와 성주군 용암면 두리방턴 축조의 의미’라는 소논문에 의하면 방천 앞의 일부 토지가 그녀 소유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단다. 홍수로 유실된 자신과 마을 사람들의 농토를 복구하면서 방천둑을 축조하게 되었다. 먹고 살 만했던 앵무 여사보다, 살기 급했던 마을 사람들이 혜택을 받은 것은 자명했다. 방천 축조에서 염농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또 있다. 제방 축조 후, 국유지로 개척된 농토는 염농산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불하되었다. 시행 주체에게 주어지는 토지 불하권을 마다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당당한 인격권을 외쳤지만 그 권리를 개인의 사욕에 두지 않고, 공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은 그가 국채보상에서 보여준 모범과 상통하는 것이었다.그의 선행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937년에는 교남학교의 부흥을 위해 부동산을 희사하여 민족운동의 당당한 후원자가 되었다. 관기에서 은퇴해 음식점을 경영한 돈으로 후원을 했다. 그의 가게는 노년까지 계속되었다니 의로운 일에 쓰이기 위한 노동을 끊임없이 한 셈이다. 넉넉한 자산은 물질적 선행을 꾸준히 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살림이 좋다고 누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근대여성으로서 삶의 주체적 자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합리적 사고로 나라와 사회를 구제하려 했고, 적극적 행동으로 자립적이고도 평등한 여성을 꿈꿨다.앵무빗돌의 머릿돌은 깨어지고 비석 뒷면은 갈라지고 있었다. 빗돌집을 오르는 계단은 방치되어 잡풀이 돋았고, 뒤쪽 공터엔 쇠락한 집터만이 남아 있어 을씨년스런 장면을 연출했다. 당국에서 앵무의 존재를 알고나 있는지 홍 할아버지께 여쭤보았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 가끔 취재를 오는 정도라고 했다. 자신도 어른들에게 귀동냥한 것을 전할 뿐, 학술적으로 많은 연구가 뒷받침되기를 바란다고 했다.김살로메 소설가앵무 여사가 축조했다는 두리방천은 앵무빗돌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대식으로 정비되어 그때의 축조 풍경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방죽을 받치고 있는 돌들 중 빛바랜 것들이 드문드문 보였는데, 그것이 앵무 여사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애국운동가나 사회사업가 교육사업가로서의 근대적 여성활동가는 드물지 않다. 앵무 여사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뒤에 머물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의연하게 나섰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평등사상과 민권의식을 고취하면서도 공익을 추구했던 사람이 앵무였다. 그것을 알기라도 한다는듯 앵무 방천을 휘도는 바람마저 당당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2021-01-27

‘태평송’을 위한 변명 - 실리 외교의 수를 놓다, 진덕여왕

여성의 삶이 점점 주목받는 사회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나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며 제 몫을 다해온 여성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우리 지역을 살다간 유·무명 여성들의 발자취를 따라 소회를 풀어가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연구자들이 닦아놓은 연대기식 여성사가 아니라 그 숨결을 찾아나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김살로메 작가가 들려줄 예정이다. 여성들이 걸어간 길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장이 될 것이다.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를 바란다. /편집자주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완벽한 객관성이란 없다. 명확한 잣대가 있는 게 아니라 서술자가 취하는 이데올로기의 방향에 따라 그 관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진실은 하나지만 기술되는 내용은 주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진덕여왕에 대한 연구자들의 기록을 대할 때 독자로서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짧은 재위 기간에 반비례라도 하듯 국제 정세의 역동성에 휘말린 여왕의 시간을 살펴본다. 여왕이 남긴 오언율시 ‘태평송(太平頌)’을 통해 여성 리더로서 느꼈을 고충을 공감하고 싶었다.여자가 왕이라는 이유로 당나라는 선덕여왕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 상대등 비담이 난을 일으켰지만 김춘추·김유신에 의해 십여 일만에 반란은 진압되었다. 와중에 선덕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고, 여왕의 사촌인 승만 공주가 왕으로 추대 되었다. 성골 출신 마지막 왕인 진덕여왕(재위 647~654) 7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국제적 정세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했을 여왕을 생각하며 능 가는 길을 재촉했다. 경주 현곡의 야산, 오솔길을 따라 200여m를 올랐다. 초행의 객이 감행하기에는 다소 외진 구릉에 햇살을 받은 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봉분 허리를 감싼 둘레돌 사이사이에 듣던 대로 돋을새김한 십이지신상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무덤 양식은 8세기 이후의 것이기에 이곳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태평송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여왕의 인간적인 고뇌를 짚어보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당시 국제 정세는 위급했다. 조여드는 백제의 공격에 조정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전쟁마다 김유신의 연승으로 이어졌지만 국권을 수호하려면 당과의 협력은 필수였다. 진덕여왕은 김춘추를 비롯해 유능한 인재들을 사신으로 보내 당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당의 의관을 좆았고, 태화(太和)라는 독자적 연호가 있었음에도 당의 연호와 책력을 따를 만큼 당 체제를 적극 수용했다. 즉위 4년인 650년, 백제와의 승전보를 알리려 춘추의 아들인 법민왕을 당 고종에게 파견하면서 지어 보낸 시가 그 유명한 ‘태평송’이다.‘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으셨네. (중략) 계절마다 기후가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선대왕들 한 덕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더할 나위 없는 아부로 가득한 내용이다. 후대인으로 가슴이 아픈 것은 여왕이 손수 시를 지은 것은 물론 비단을 짜고 수까지 놓았다는 점이다. 삼단 콤보로 행한 이 굴욕적 외교 방식은 주체적 여성 시각으로 볼 때 치욕에 가까운 방식이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당시 천자국을 향했다지만 진심에서 나온 방식은 아닐 것이다. 섬세한 여성성을 외교에 적극 차용할 수밖에 없었던 진덕여왕의 심정은 어땠을까.이러한 여왕의 외교술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외교적 수사였음을 적극 변호하고 싶다. 풍전등화의 국운 앞에 실체 없는 명분이 무슨 소용일 것인가. 국제적 제휴의 손길이 필요했던 여왕으로선 그보다 나은 실리적 외교법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김살로메 소설가여왕의 이런 정성이 당 고종을 감동시킨 것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 당 고종은 여왕의 죽음 앞에 예를 갖춰 애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시늉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확실한 태도를 취하는 방식, 현명한 소통법이 아니었을까.살다보면 굴욕이 최선의 공격일 때도 있고, 치욕이 최상의 전략일 때도 있다. 굴욕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낮아짐 없이 펄럭이는 깃발이 어디 있을까. 하산 길, 왕릉 동쪽으로 ‘동녘골’ 저수지가 보였다. 혹시라도 진덕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 못 주변을 살폈다. 구체적 실체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바스락바스락 무언가 교감을 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겨울 얼음장 조이는 소리였다. 마치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옥좌의 부담감을 감내해야 했던 한 여인의 뒤늦은 고백처럼 그 소리, 귓전에 오래 머물렀다.

202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