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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옥잠화

맑고 깨끗한 향기와 눈처럼 흰 색깔의 꽃이 핀다. 꽃이 비녀를 닮아서 옥비녀 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오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토종인 비비추와 닮은 점이 많다. 햇빛이 적당히 드는 반그늘을 좋아하므로 나무 그늘 밑에 많이 심는다. 풍성한 잎이 매력적이며, 꽃은 8월부터 한 달가량 잇달아 핀다. 흰색의 옥잠화 꽃은 오후 4시경부터 꽃잎을 벌리는데, 밤에는 향기가 좋다. 물을 좋아하므로 잎이 나오기 시작하는 메마른 봄철이나 한여름 건조기에는 저녁에 물을 충분히 줘야 한다. 2년에 한 번 정도 포기를 나누어 번식시킨다. 어린잎은 나물로 먹는다. 옥잠화 차는 서늘한 기운이 있어 소변이 불편 하거나 인후염에 효능이 있다. 종기나 상처에 꽃을 짓이겨 붙여 아물게 하는 데 쓴다. 혈관을 확장 시켜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열을 내리고 해독하며 몽우리와 종기를 가라앉히며, 매일 아침 옥잠화 잎으로 즙을 짜낸 다음 벌꿀을 섞어 얼굴에 바르는 일을 옥잠화 꽃이 질 때까지 하면 여드름과 주근깨를 없애는 데 효과를 볼 수 있다.옛날 옛적 중국에 피리 부는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피리 한 곡조를 불고 있는데, 홀연히 하늘에서 선녀가 나타났다. 그리고는 옥황상제의 따님이 방금 곡을 다시 듣고 싶어 하니 한 번 더 불러달라고 말했다. 피리의 명수는 선녀의 부탁대로 하늘의 공주님을 위해서 아름다운 연주를 해 주었다. 그러자 선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꽂고 있던 옥비녀를 던져주었다. 그러나 옥비녀는 피리 명수의 손을 스치며 땅에 떨어져서 그만 깨져 버리고 말았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얼마 뒤 그 자리에서 이름 모를 꽃이 피어났다. 그 꽃봉오리의 모습이 선녀가 던져주었던 옥비녀와 비슷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꽃을 `옥비녀 꽃`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김한성 수필가·한문 지도사

2015-10-02

군위군 산성면 화본 마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태고의 신화처럼 좀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밀고 들어선다. 마치 사십여 년은 기다렸다는 듯 기찻길에서 어른거리는 추억 하나.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보고 쓸쓸히 돌아서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면 어떡하느냐고 쫓아오던 열이, 눈물이 나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허랑허랑 꽃잎만 날리고 기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적을 울리며 달렸다. 내 열아홉의 봄을 싣고서. 달달한 것을 많이 먹어서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일행의 말에 내 추억이 화들짝 달아난다. 살아있다는 건 달콤한 브라우니를 먹다가 쓴 커피를 마시는 일. 차창 밖으로 주체 못 할 외로움이 겨울바람에 실린다. 레일 카페에선 지나간 상처도 아름다워진다.군위군 산성면 화본 마실이다. 인구 250명에 불과한 오지, 화본 마실은 이제 전국 최우수 마실로 우뚝 섰다. 연 15만 명이 찾는 경북 지역의 주요 체험, 휴양 마실로 자리 잡았다. 1박 2일 촬영지로 입소문을 타서인지 관광객 수가 해마다 늘고 있다.사람들은 심리적 허기로 무엇이든 채우려 한다. 꾸역꾸역 먹다가 체하기도 하고 먹으면서 울기도 한다. 눈에라도 담고 입으로라도 채워야 구멍 난 가슴이 메워지는 것일까. 그래서 여행을 구매하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좋다고 하면 가봐야 하고, 맛있다고 하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사람들은 모방하면서 위안을 얻고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 아닐까. 나도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화본 역은 전국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간이역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교통수단이 되어 주었던 조그만 역. 아직 하루에 여섯 번은 열차가 다닌다고 하니 한번 타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리라.이 역은 단선의 중앙선 철도이다. 경성에서 영천까지 연결하고 나중에 경주까지 이어서 경성의 `京`, 경주의 `慶`의 첫 글자를 따서 `경경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중앙선이라 부른다. 중앙선이 지나는 지역은 금, 동, 아연, 흑연, 석탄, 목재, 쌀 등이 풍부했다. 일본은 자국에서 공급해오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약탈한 물자를 만주까지 실어 나르기에 충분했다. 물자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사용되었다. 또 경경선의 이점은 함포 사격에 의한 파괴의 위험을 안고 있던 경부선에 비해 군사적으로도 매력적인 노선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경경선을 개설했다.화본 역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던 급수용 탑이 볼거리이다. 마치 동화 `라푼젤`에 나오는 성 같다.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본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밖에서 문을 잠근다. 어쩔 수 없이 동화 속 라푼젤이 되었다. 마법의 머리칼을 가진 라푼젤 공주를 납치해온 고델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공주를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라푼젤은 갓난아기 때부터 높은 탑 속에 갇혀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간다. 왕과 왕비는 해마다 공주의 생일이 되면 그녀가 돌아오길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등불을 날린다. 그 등불은 라푼젤이 갇혀 사는 성에도 날라 온다. 라푼젤은 한 번만이라도 성을 나가 등불을 보는 것이 꿈이다. 우연하게도 그녀의 오랜 꿈을 실현해 줄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도둑, 유진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악녀를 물리치고 꿈을 이룬다.“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 모든 날, 밖을 바라보고 있던 수많은 세월. 어떻게 이렇게 모르고 살았을까, 지금 난 여기에 있어. 분명히 내가 원하던 곳에 내가 있지. 마침내, 그 불빛을 보고 있어. 마치 안개가 걷힌 것 같아. 새로운 하늘이 열린 것 같아. 따뜻하고 밝아, 왠지 세상이 바뀌고 있어.” 동료가 창밖에서 오백 원 주면 문을 열어주겠다며 협상을 한다. `내 청춘의 어느 날도 라푼젤처럼 갇힌 날들이 있었지. 그땐 세상 밖으로 도망칠 용기가 나지 않았어. 도망칠 용기보단 먹고살 자신이 없었다는 게 맞을 거야. 살다 보니 안개가 걷히는 날도 오더라구. 나를 가두기 위해 놓은 덫이 사람 살리는 길이 되기도 하더라구. 삶은 지나보니 별 게 아니었어. 그런데도 아등바등 사는 게 인생살이더군.` 화본역만 보고 가기엔 발길이 섭섭해서 폐교를 추억의 장소로 꾸민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를 보기로 했다. 난로 위에 놓인 양철 도시락이 과거의 추억 하나 끌어올린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까먹고 딸그랑거리며 흔들어 대던 몇몇 남자아이들. 복도에 꿇어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너나없이 출석부로 머리를 한 대씩 때리고 갔다. 그래도 즐겁다고 깔깔거리던 그 아이들도 이젠 선생님과 같이 늙어가고 있다. 일 년에 두어 번 만나는 선생님이 이젠 오빠 같다.급훈이 `옆 반 정복`이다. 일행 모두 배를 잡고 웃는다.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 아닐까. 우리 어렸을 적에도 선생님들은 옆 반에 지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기성회비 빨리 안낸다고 학생들 따귀도 서슴없이 올려붙였다. 원망 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흘겨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지금쯤 큰 부자가 되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살고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월급을 기성회비 못내는 아이들에게 대신 내준 선생님도 있었다. 그런 선생님은 왜 기억에서 더 빨리 잊혀지는지.“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니의 긴 이야기를 듣자//미워도 다시 한 번, 2014년이여.

2014-12-26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마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한적한 겨울 거리는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미처 떠나지 못한 낙엽들이 거리를 헤맨다. 저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 광활한 우주에 떠돌이로 돌다가 생을 마치는 건 아닌지 이름 모를 노숙자들의 삶 같아 쓸쓸하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을 비롯해 도산서원, 퇴계 종택, 농암 고택, 군자마을 등, 양반 고을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쉰다. 차로 이동하는 중에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의 비석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안동은 한국 근대 최초의 갑오의병이 일어난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아닌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유공자, 자정 순국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내 조상의 고향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안동 땅을 밟으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아버지도 양반가 집안에서 나고 자라신 분이다. 한학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보니 예(禮)를 중히 여겼다.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마실 이다. 이 마실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그윽하고 구석진 두메산골로 고려 공민왕의 전설이 흐르는 곳”이다. 마실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낙동강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 마실은 항일 독립운동을 한 지사가 많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인 저항 시인을 만나 본다.이육사이다. 선생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서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원천리는 먼 냇가 마실이란 뜻이다. 국어책에서 대하던 이 육사가 나고 자란 곳을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기억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강철로 된 무지개를 따라 마침내` 안동에 왔다.원천리 마실에 세워진 이육사 문학관은 겨울이라 그런지 썰렁하다. 앞에는 확 트인 들판과 낙동강이 흐른다. 전시실엔 시인이자 독립투사인 이육사의 문학세계와 독립 운동사를 볼 수 있다. 이 마실은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 불렸다. 안동댐 건설 전에는 마실 앞 모래강변에 서식하는 은어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면 이 곳에서 백일장과 시낭송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선생의 대표작 `절정`이 새겨진 시비를 보며 왕모산을 올랐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왔을 때 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고 하여 왕모산이라 한다. 홍건적이 이곳까지 진격하여 공민왕이 위태롭게 되자 백마 탄 늙은 장수가 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했다는 전설이 흐른다. 왕모산 능선을 비켜서 있는 갈선대는 웬만큼 담이 크지 않고서야 벼랑 쪽으로 다가갈 수조차 없다. “한 발 재겨 디딜” 곳 없이 아찔하다. 절벽은 칼을 세워둔 듯 날카롭기까지 하다. 이곳은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의 시상지로 유명하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두 싯구는 절벽에 서 본 자만이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거다.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적 상황은 벼랑 끝에 선 것과 다름없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선생은 희망을 보며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 했다. `강철`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이는 선생의 의지가 아닐까.어디서 보았던가. 갈선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섬 속 마실, 회룡포를 닮았다. 이 마실은 도산구곡 중 여섯 번째인 천사곡과 일곱 번째인 단사곡 물길이 태극 모양을 하며 마실을 휘돌아 삼남으로 흘러간다. 절벽이 신기하여 하산하면서 산 아래에서도 올려다보며 시를 음미해 본다.“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육사는 이곳에 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시로 표현했다. `절정`은 시들어가는 민족혼을 눈뜨게 해준 횃불과도 같은 시다.선생의 본명은 이 원록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설다. 늘 `이육사`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형, 아우와 함께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고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다. 그때부터 수감 번호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사십 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무려 열일곱 번이나 투옥되거나 구금되었다. 네 아들의 피 묻은 빨래를 해야 하는 선생 어머니의 고통 또한 얼마나 컸으랴. 선생은 짧은 생애 동안 서른아홉 편의 시를 썼는데 여섯, 일곱 편 가량이 명시로 알려졌다. 작품 속에는 독립에 대한 강철 같은 의지와 나라 잃은 슬픔이 담겨져 있다.작품성도 우월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곳곳에 베여 있어 부끄러움에 고개가 수그려진다. 일제 강점기, 암흑시대를 밝혔던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인 이육사를 가슴에 묻고 간다.“툰드라의 새벽이 차다.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가.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발자취 소리.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겨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황혼녘에 내리는 외로움이 가슴을 엄습한다. 이를 어이할꼬.

2014-12-19

무릉도원이 예일까, 월든 호수가 여기일까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소담한 마을이다. 도시의 갑갑함을 버리고 훌쩍 떠나온 길에서 생명 숲을 만났다. 도하송이 허리를 굽혀 반긴다. 섬솔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푸근히 감싸 앉는다. 휴(休). 숲이 주는 치유이다. 호산지당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연못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원시적 신비로움마저 감돌게 한다. 우주를 품은 듯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에 수기(水氣)를 채우면 인재가 많이 난다고 해서 후손들을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이다. 벤치가 좀 쉬었다가라고 말을 건넨다. 고마움에 덥석 앉았다. 잠시 무게에 짓눌렸던 인생의 짐을 내려놓았다. 힘 있는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자연 앞에서는 평등한 것을.“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오. 가리업시 그저 말뿐이듯이….”성공과 출세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자리를 버리지 못하고 매여 있었던가. 훌훌 던져버리고 자연인이 된다. 이 이상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거창한 행복보다 소소하게 느끼는 일상적인 여유로움이야말로 청복(淸福)인 것을. 홀연히 가다가 복사꽃 핀 숲을 만나 선경에 드는 도연명처럼, 나도 잠시 넋을 빼앗겼다. 무릉도원이 예일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가 여기일까. 아름다움에 취해 영영 길을 잃어버려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덕동`은 덕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고 하여 불린 지명으로 자금산 남쪽 산기슭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명에서부터 마을 사람들의 인품이 느껴진다. 남의 일, 내 일 구분 없이 서로 한 가족같이 지내서인지 어르신들의 환한 표정이 여느 동네와 사뭇 다르다. 공유(共有), 공산(共産), 공생(共生)이 숨 쉬는 이상세계, 안생생(安生生) 대동(大同)사회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비운 자들만이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가진 것이 없으니 비울 것도 없지만 부요해지고 싶은 것은 인간이 지닌 욕망이 아닐까. 이곳에서는 꿈틀거리던 욕망마저도 저절로 수그러드는 것 같다. 세상은 크게 보면 다 같을 지도 모를 텐데 내 몫에 눈이 먼다. 명예에 눈을 닫고 욕심을 버리면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련만 남보다 앞서 달리려고 한 내 발이 새삼 부끄러워진다.농재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직에 나가 있자 어머니 봉양을 위해 물 좋고 산 좋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손대대로 이어져 오는 문사의 마을이 된 것이다. 360여 년 동안 후손들은 조상의 뜻을 기리고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243호 용계정은 정문부의 별장이고, 민속자료 제80호 애은당은 피난처다. 그 외 3량가납도리집인 제81호 사우당, 문화재자료 206호 여연당, 제373호 오덕리 근대 한옥, 덕계서당, 민속박물관 등이 있다. `덕동민속전시관`은 가족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 분재기를 비롯하여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보물창고다.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지 않다. 덕동의 옛 이름은 송을곡이다. 왜병은 `송`자가 들어간 곳은 전쟁에서 패한다는 설이 있어 덕동마을은 피해갔다고 한다. 환란을 당했을 때 임시로 몸을 거처하기에는 여기가 낙양 같은 길지여서 왜병도 피해간 곳이라고 한다. 의병장 정문부 가족도 임진왜란을 피해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민속자료 제80호로 지정된 애은당이 정문부가 기거한 고택이다.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포항시 기북면은 문헌상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부곡의 옛터가 국내 최초로 확인된 곳이라고도 한다.`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법 부곡` 현장이 주변 마을에서 확인되고 있다. 신라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철과 연관된 철물기구와 무기 생산 공장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까이에 있는 `벼슬재`는 벼슬을 가진 이들 외에는 넘지도 못했다고 한다. 용계정 앞에 섰다. 잠시 검문을 하려는 듯 통허교가 신호를 보낸다. 고고한 선비들의 넋이 세속의 먼지 묻은 사람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아 머뭇거리다 신발을 털고 정각에 들었다. 수려한 경관이 눈을 홀린다. 벼랑 암벽 위에 세운 정각 앞으로 용이 노닐다 비상했다는 계천이 흐르고 솔숲과 연못이 아우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달빛에 어우러져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한다. 나도 어느 사이 사람들 틈에서 와유(臥遊)를 즐기며 곡수에 술잔을 띄워 본다. 하늘 한 자락이 지붕 위로 내려앉는다.`사의(四宜)`는 용계정의 옛 정각 이름으로 농재 이언괄 선생의 4대 손인 사의당 이강이 착공했다. 사의(四宜)는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를 뜻한다고 한다. 마음이 몸 밖으로 도는 것을 경계하고, 눈이 끌리는 곳에 무릎 꿇지 말라는 섭심(攝心)일 것이라고 나름대로 가정해 본다. 이강은 솔숲을 거닐면서 소나무의 푸른 절개와 기상을 닮고자 했으리라. 선비가 지켜야 할 도리 앞에서 때론 자신도 풀 같이 흔들리는 나약한 범인(凡人)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스스로를 채찍질한 사의혼(四宜魂)이 그의 아호인 사의당(四宜堂)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속 일을 멀리하고 심부를 다스려 후학에 힘쓰는 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임을 알고 몸소 보이려 했던 것이리라.물질의 풍요와 편리를 다 누리고 살면 오히려 독이 되니 적당히 억제하며 사는 것이 이롭다는 가르침을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조상들이 남긴 숨결에서 큰 깨우침을 얻는다. 나는 후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문화유산을 곱게 물려주기 위해 애써 가꾸는 덕동마을 사람들의 사의정신(四宜精神)을 가슴에 고이 담는다.배웅하는 도하송을 뒤로 하고 숲을 빠져 나왔다. 아쉬움에 걸음이 느릿해진다. 휴(休). 숲도 나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자꾸만 등에 기대라 한다.

2014-12-12

내가 흘린 피 묻은 돌을 거두어 달라

삶의 무게를 다 털어내고 서 있는 나목. 초겨울 속으로 짧은 햇살이 스며든다. 마지막 이파리 마저도 갈 길을 가고, 무성했던 지난날의 영화만 남아 오가는 이의 가슴을 적시는구나. `영주 순흥`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조선 시대 삼백오십 삼 년 동안 사천여 명의 선비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일까.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복원한 선비촌에서 묵객이 되어보는 즐거움일까. 퇴계 이황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가 걸었던 소백산 자락을 따라 걸으며 초겨울의 정취를 느껴보는 낭만일까. 영주 순흥면 마실에선 어떤 꿈도 이루어진다.금성대군의 충절이 서려 있는 금성단이 발목을 잡는다.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의사들의 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홍천 현감 이대근이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다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하여 비껴가는 곳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날 밤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그곳은 자신이 피 흘린 곳임을 말함으로써 곧 부사와 함께 사람을 시켜 조사한 후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신단 뒤에는 금성대군의 죽음을 지켜본 경상북도 보호수, 제46호인 천 이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충신수라고도 하며 순흥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경이로운 이력이 있어 유명하다. 언제부터인지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나네.”라는 참요가 불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순흥 도호부가 초토화되면서 이 나무도 불에 타 죽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밑둥치만 남아 있는 나무에 새로운 가지와 잎이 돋아나더니 노래처럼 순흥부도 다시 설치되었다고 한다. 금성대군과 연관된 수양대군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수양대군의 이름은 진양대군이었으나 세종이 대군의 성품을 알고?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를 가진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수양대군은 아버지보다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을 더 따랐으며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을 “글만 볼 줄 아는 돼지”라고 대신들 앞에서 서슴없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품으로 보아 피의 군주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태종이 수양대군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던 절을 찾았는데 그 절의 주지승이 수양대군을 빤히 뚫어보더니 “수양대군께선 상왕 전하를 쏙 빼닮으셨습니다.”란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이 기분이 좋아서 어디가 그리 닮았느냐고 물었다. 주지승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왕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태종처럼 수양대군도 형제를 죽이며 손에 피를 묻힌다.사육신 중 박팽년의 일화는 유명하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자신에게 `전하`라고 부르면 살려준다고 하자 “나리, 수양대군 나리, 나리 나리 개나리, 여자도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거늘 하물며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제게 `전하`는 어린 단종뿐입니다.”라고 하여 세조의 분노를 샀다.영주시 단산면에 있는 소백산 고치령도 금성대군과 단종의 한이 서려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밀사들을 시켜 이 고치령을 넘나들게 했던 곳이다. 고치령 정상에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신 산령각이란 사당이 있다. 영월 사람들은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었고, 영주 사람들은 금성대군이 죽어서 소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었다. 두 영정이 산령각에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인 고치령에 금성대군과 단종의 혼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순흥 고을에 사는 이 선달이란 이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가 흘린 피 묻은 돌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거두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 돌의 모양도 일러 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동 냇물을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있었다. 구한말에 왜군들이 순흥에 쳐들어와 죽동 서낭당 앞에 침을 뱉고 배설을 하는 등 왜군들의 무엄한 짓거리가 극에 달했다. 이 무렵 어느 주민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서 죽동 서낭당에 안치된 돌을 조용하고 정결한 자리로 옮기도록 일렀다. 이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밑 두레골로 옮겨졌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순흥 면민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 새벽에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치며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정월, 처음 열리는 장날에 수송아지를 흥정하지 않고 제값 주고 장만한다. 수송아지는 제삿날까지 `양반님`으로 불리며 금성대군의 화신으로 대접받는다. 선정된 제관들은 매일 죽계천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제사를 지낸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며 한 수 배우고 옳고 그름도 알게 된다. 권력이란 참 묘한 놈이다. 발을 디디면 디딜수록 빠져드는 마약이다. 그 맛을 본 사람은 헤어나질 못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도 많다. 남의 권세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권력인양 위세를 부리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세조는 말년에 문둥병으로 죽고 그의 두 아들도 오래 살지 못했다. 현재의 내 모습은 지난날 내가 한 행동의 대가라고 했던가.

2014-12-05

바위에 내린 별들의 이야기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파도에 황금빛 꽃들이 몰려왔다 밀려가며 신생의 시간을 만든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열과 믿음의 증표는 저 바다에 잠겨 고요하다. 스치고 간 여름날의 흔적이 모래 속에 잠겨 있다. 추억도 오래 묻혀 있으면 암각화로 남아 후세에 전해질까. 칠포 바다는 그저 말없이 낮은 숨결로 노래만 한다. 칠포 해수욕장 뒤편 곤륜산 자락에 들었다. 마땅한 주차장이 없어서 멸치 공장에 차를 부렸다. 조업한 멸치를 쪄서 말리는지 작업하느라 분주하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지 기피 업종엔 동남아 근로자가 있다. 우리나라도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언니, 오빠들이 간호사와 광산 근로자로 독일에 갔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했다. 그들도 작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이지만 크게는 자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다문화 시대에 맞게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었으면 좋겠다.타임머신을 타고 3천 년 전, 칠포 마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항 흥해읍 칠포리 마실 암각화는 인근 7개 지역에 걸쳐 흩어져 있다.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 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을 새겨 그들의 생각이나 염원을 그린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암각화는 모두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새김 법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새김 법이란 흑요석이나 화강암, 석영 따위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이나 청동, 혹은 다른 견고한 도구를 사용하여 바위 표면을 쪼아내거나 파고, 갈고, 그어서 새기는 것을 일컫는다. 칠포리 암각화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한 개의 문양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자들이 볼 땐 실패 모양의 문양이 남자들의 눈엔 여체로 보이나 보다. 잠재해 있던 무의식이 드러나서 웃음이 나온다. 일행은 서로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며 행복해한다. 칠포 마실의 암각화는 방패나 실패 모양의 그림, 돌화살촉으로 보이는 세모 모양의 그림과 윷판, 별자리 등이 있다. 별자리 문양은 고대인들의 죽음과 탄생에 대한 관념을 반영하거나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고인돌에는 유독 북두칠성 그림이 많다. 우리 민족은 하늘과 달과 북두칠성을 중시했다. 오행성의 수 5와 여기에 해와 달을 더한 수 7을 즐겨 사용했다. 옷을 재던 자에서도 5와 7이 번갈아 가며 눈금으로 사용된 걸 보면 몸에도 별을 두르고 싶었나 보다. 떡판에도 눈썹달 모양과 보름달, 별 모양이 새겨져 있다. 우리 민족은 별의 정기를 받아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일곱 개의 별, 즉 칠성을 믿는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북두칠성에서 세상으로 인간이 오고, 죽으면 다시 그 별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고 복을 내리기도 하지만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한다.고인돌 상석에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이 간다. 단군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을 가장 숭상했던 나라는 고구려였다고 한다. 임금 스스로 자신을 북두칠성의 화신으로 생각하여 국강이라고 하였다고 하니 예사로이 넘길 별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장례 풍습에서도 북두칠성 모양을 형상화한 칠성판을 볼 수 있다. 시신을 안치하는 칠성판이 그렇고 송장을 일곱 매듭으로 묶는 것 또한 칠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특한 풍습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역시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떠 조경한 독창예술품이라고 한다.북두칠성이 지닌 신비로운 전설은 다른 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라비아에 전해지는 전설이다. 아라비아에서는 국자 모양을 관으로 보는가 보다. 세 명의 딸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남자에게 살해를 당했다. 세 딸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알고 있지만 무서운 남자여서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세 딸은 아버지 시신이 든 관을 끌고 범인의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원망만 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식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범인도 우발적으로 살해는 했지만 차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바로 북극성이다. 아라비아에서는 북극성을 살인의 별이라고 부른다.노중평 선생은 어느 책에서 북두칠성은 항상 동북 간방에 떠서 서남 곤방으로 진다고 했다. “이 방위를 귀방(鬼方), 즉 귀신의 방위라고 한다.” 북두칠성이 이렇게 귀신의 길을 매일 한 번씩 지나간다는 것이다. “귀신의 길은 신명이 활동하는 길이다. 간방은 신명이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므로 표귀방(表鬼方)이라고 하고 곤방은 신명이 숨어서 활동하므로 이귀방(裏鬼方)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간방에 속해 있으므로 표귀방에 있다.” 북두칠성이 표귀방에서 떠서 이 귀방으로 지므로 한밤에 귀신이 나타났다가도 닭이 울면 사라진다고 하는 설화가 생겼나 보다.흩어져 있는 암각화들을 보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오줌바우는 꼭 봐야 하는데 좀체 찾을 수 없다. 그곳에 사는 주민에게 길을 물은 것이 잘못이었다. 자신의 마실에 그런 문화재는 없다고 하여 걸음을 돌렸다가 다시 와서 찾았다. 김유신의 누이 보희는 꿈에 선도산에서 오줌을 누었는데 서라벌이 다 잠겼다. 꿈 얘기를 들은 동생 문희는 그 꿈을 사서 문명왕후가 된다. 우리 일행도 깔깔거리며 오줌 누는 시늉을 했다. 왕비는 아니더라도 글 판에서 대어는 낚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바우에서 오줌을 누면 칠포리가 잠길까.

2014-11-28

천마, 천년의 잠 깨고 세상에 나오다

한기가 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겨울옷을 준비하지 못한 게 탈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휩싼다. 기침이 연신 터져 나와 땅 신에게 절을 한다. 단풍든 나무는 여전히 곱다. 가을을 떠나보내기가 아쉬운지 여행자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도 카메라에 추억을 담느라 바쁘다. 대릉원 입구에서 미추왕릉을 묻자 안내원은 대뜸 김 씨인 지를 묻는다. “아니, 어떻게 아세예. 김가인가를.” `경주에 점쟁이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 사람도 혹시….` “미추왕이 경주 김 씨 조상이라고 카던가….” 안내원은 미추왕릉만 찾으면 모두 경주 김 씨로 보이는가 보다. “전 신라에 멸망한 고령가야 후손 함창 김간데예.”미추왕릉은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했다. 교전을 벌였으나 물리치지 못했는데 홀연히 나타난 귀에 댓잎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더니 적을 물리쳤다. 사라진 그들을 찾던 중 죽장릉에 죽엽이 쌓여 있음을 보고 아군을 도운 것이 대나무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장릉이라고도 부른다. 몇몇 가족이 능 위에서 미끄럼 탄다. 마침 지나가던 관리인이 보고 내려오라고 손짓한다.대릉원은 신라의 왕권 강화가 이루어졌던 4세기에서 5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추증한다. 2천 년 대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의 규모로는 가장 크다. 그중에서도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과 대릉원이라는 이름을 짓게 한 미추왕릉, 경주에 있는 고분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이 있다. 대릉원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수학여행 온 학생들 틈에서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얼른 줄을 섰다. “여러분, 선생님 말 잘 들리나. 어이, 거기, 여길 잘 들따봐라. 하얀 천마가 보일 끼다. 거기 뒤에 있는 학생들 안 보이제? 한 줄만 요 앞으로 나온나.” 고개를 기웃거리며 발돋움해보지만 워낙 많은 학생 틈바구니에서 보일 리 없다. 귀만 곧추세운다.“여기 보이는 기 천마도장니라고 하는 기다. 천마총에서 출토한 것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게 이거다. 니, 혹시 공부하면서 장니라고 들어본 적 있나? 야야, 왜 뒤를 돌아보노? 니보 고 하는 말이다. 승혀니 니.”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키득 키득 웃는다. “자, 자 조용히 하고, 우선 장니가 뭔지 들어봐라. `장니`는 말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려 놓은 가리개라고 보만 된다.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가만히 들따보만 하얀빛이 돌 끼다. 바로 저게 자작나무 껍질인데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천마를 그린 기다.” 그래서 백화수피제 말다래라고도 하는가 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 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알겄나?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이 능의 주인이 누군진 모르지만 여기서 이게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붙인 기다.”천마는 왕을 태우고 금방이라도 날개를 활짝 펼칠 것 같다. 혀를 내민 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신의 기운을 보여준다고 한다. 흰색의 천마는 동물의 신으로 죽은 사람을 하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다.대릉원 안에서도 `총`과 `능`으로 구분된 무덤을 보며 무덤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해진다. `묘`와 `능`은 알고 있지만 `총`은 딱히 구분하지 않았었다. `능`은 왕의 무덤이고, `묘`는 왕이 아닌 사람의 무덤, `총`은 왕릉급이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밝혀지지 않은 무덤을 부를 때 쓴다고 하니 잘 알고 써야 무지함이 드러나지 않을 것 같다. 거대한 `천마총`의 주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흔히 왕릉을 발굴할 때 미스터리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파라오의 저주가 떠오른다.“파라오의 잠을 깨우는 자, 죽음의 저주가 있으리라” 영화를 보면 발굴에 참여하거나 후원했던 사람들 다수가 의문사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후세 사람들이 우연한 일치를 확대하여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의 카나본 경은 파라오의 발굴을 후원한 사람인데 이집트의 한 호텔에서 모기에 얼굴을 물려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왼쪽 뺨에 물린 모기 자국과 투탕카멘 왕 미라의 왼쪽 뺨에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했다고 한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천마총에도 발굴 당시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전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가뭄이 계속되자 경주 사람들은 왕릉(천마총)을 발굴해서 하늘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천마총을 발굴하면서 순금의 황금보관을 발견하고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발 짝 떼는 순간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어둑해진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지막한 담 밑에 들꽃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들꽃은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몸을 낮춰야 볼 수 있다. 담 너머로 개 짖는 소리,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느껴보던 마실 풍경이다. 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의 집에서 커피 향이 새어 나온다.

2014-11-21

청송군 청송읍 파천면 송강리 마실

가을은 창조주가 가장 아름답게 쓴 한 편의 시다. 미사여구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어떤 말로도 방점 찍을 수 없는 어휘력의 부족함, 자연의 힘이다. 산도 울긋, 사람도 불긋,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단풍든 나무다. 하마터면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걸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낙엽 침대 위에 누워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이 세상 누구의 집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느 부자도 이런 집에선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편지가 날아온다. 가을이 주는 축복을 두 손으로 고이 잡는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바쁘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면서. 부부가 다정하게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시샘 난 일행이 “아즉도 그럭케 부터 있고 십나. 고마 떠러져랴. 이젠 다른 거 하나 자바라” “다른 거 언제 삼십 년 길들여서 사노. 그러다 늙어 죽어 삔다. 기냥 살란다” “야야, 고마해라. 금실이 얼매나 조은데 깨 놀라 카노.” 한때, 남편 재 사용법이나 남편을 판다는 등의 글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적이 있었다. 가을 나무 옷 색깔만큼이나 삶의 무늬도 다양하다.청송군 청송읍 파천면 송강리에 있는 수정사 가는 길에 목계 성황당이 있다. 마실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며 동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목계 성황당은 유형문화 유산 제24호로 1940년 안동 권씨의 현몽을 계기로 지어졌다. 당시 마실 농지에 멧돼지 출현으로 피해가 막심했는데 하루는 권 씨 꿈에 성황신이 나타나 거처가 마땅치 않다고 꾸짖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실 사람들은 성황당을 지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멧돼지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수정사 가는 길목에 목계 솔밭이 있다. 이백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 곳이다. 그윽한 솔 향을 맡으며 수정사 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숨이 가쁘다 싶을 정도의 거리에 무덤 두 개가 나온다.“잡초만이 무성한 성터에는 고요한 달빛이 푸르게 비친다다다. 어디서 들리는지 풀벌레 소리이이, 외로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멎게 한다. 일제의 탄압 아래서 우리 민족의 설움을 실어 즐겨 부르던 황성옛터어어어, 그 옛날을 그리며 이애리수 노래를 들어봅니다.” 변사의 신파조 목소리에 가수는 경기 개성 사투리로 노래를 불렀었다.“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어른들을 따라 흥얼거리던 그 노래의 작사가 왕평 이응호 선생은 청송읍 파천면 수정사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황성 옛터는 항일가요 1호이자, 우리나라 가요의 효시이며 조선의 세레나데이다.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민족 정서를 반영했다. 이로 왕평 이응호 선생은 일경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황성 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다. 선생은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민족성이 강한 노랫말을 담아 `대한팔경`과 `조선행진곡` 같은 노래를 만들었지만 일제에 의해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선생은 1908년 영천군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영천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배제 중학교에 다녔다. 어린 시절 조부 산소의 비문을 직접 쓸 정도로 신동이었다. 1941년을 평북 강계에서 신카나리아 여사와 함께 `남매`라는 극 공연 도중 고혈압으로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계사에서 화장 후 수정사 앞에 묻혔다. 그때 나이 삼십삼 세였다.당시 무대 감독이며 작사자인 왕평과 바이올린 연주자요, 작곡가인 전수린이 개성 공연을 마치고 고려의 황궁인 달빛이 비치는 만월대를 산책하고 있었다. 고려의 퇴락한 성터엔 무성한 잡초만 우거져 있고 풀벌레 소리만 들여왔다. 비 내리는 객지의 여인숙에서 만월대의 밤을 회상하던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들어 즉흥적으로 연주했고 그 멜로디를 왕평은 오선지에 옮겼다. 그해 가을 그들이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는 막간을 이용해서 `황성 옛터`를 불렀다. 객석에 있던 관객들은 식민지 설움과 애절한 노래 가사에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이애리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도 함께 부르게 되었고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수 있다고 하여 발매를 금지했다. 또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하는 즉시 심문하고 취조했다.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는 창가 시간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음악 선생이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왕평과 전수린은 이 일로 종로 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유치장에 갇혔다. 그러나 황성 옛터는 끈덕지게 불렸고 이애리수는 민족의 여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술좌석에서 황성 옛터를 즐겨 불렀다. 노래 속의 황성(荒城)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왕평 선생의 업적에 비해 봉분 없는 초라한 무덤이 퇴락한 고려의 옛터를 보는 듯하다. 신동은 왜 요절하는가. 요절했기에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무는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무덤 앞에 낙엽 비만 소리 없이 내린다. 내 차에 단풍잎 하나 따라온다.

2014-11-14

파도 소리 들으며 솔숲에서 잠들어 볼거나

계절을 느낄 수 없는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넘실 넘어가 본다. 휘드린 내 운명을 틀고 틀어서 바다에 잠재운다. 속이 후련해진다. 파도는 사탕 발린 유혹처럼 거침없이 끌어당긴다. 못 이긴 체 알몸으로 서서 가을의 허기를 채워 볼까나.어느 가을, 월송정 앞바다에서 연인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남자 눈에 띄었다. 둘은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네 잎 클로버를 찾듯 모래를 뒤적이다 몇 개 더 주워 가슴에 넣었다. 동전엔 샤머니즘의 흔적이 거무튀튀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용신에게 바친 동전이었나 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파도에 쓸려온 것들이 많았다. 모래 틈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가 눈에 띄었다. 터지지 않은 총알이었다. 남자는 여자가 변심 하면 그 총알로 자신의 심장을 쏠 거라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시계추가 멈춰 버린, 총알을 주웠던 그 자리에 붉은 꽃 한 송이 피고 졌다. 이 사실을 아는 이 없다.“피할 수 없는, 피해갈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오래전에도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차마 떠나지 못해 여기 남아 있을 것이거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오직 너는 나의 너였거늘.” 네가 나를 떠나보냈어도 나는 너를 떠나보내지 않았으니 이별이란 본래 없는 게 아닌가.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마실에 아름다운 솔숲과 정자가 있다.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 들고 솔숲을 걷는다. 혼자 나선 여행길이 외로울 때가 있다. 심리적 허기를 달래면서 부지런히 과자를 입으로 밀어 넣는다. 앞서 가던 꼬마가 엄마 손을 뿌리치고 쪼르르 달려가 길섶의 풀을 뽑는다. 소꿉장난이라도 하려는 걸까. 궁금함에 뒤를 연신 돌아다 봤다. 아이의 등 뒤로 맑은 햇살이 친구 하자고 내려앉는다.월송정에 올라보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양반놀음이나 해볼까나. 풍광이 좋은 곳에는 어디든지 정자가 있다. 민초들은 풀뿌리로 연명해도 양반들은 민초들의 혈세를 빨아 명당 터에 정자 짓고 풍류나 일삼았다. 그들은 민초들과 아픔을 나눈다며 철썩 같이 약속하고도 부정부패의 선두에서 호의호식했다. 비리로 일관된 삶이 드러나도 기억이 안 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탈세는 또한 그들이 앞장서서 저질렀다. 죽어나는 것은 손바닥 보듯 빤한 살림의 민초들이다. 오죽하면 돈 주고 양반 문서를 살까. 외빈내화(外貧內華)의 탈을 쓰고 산 양반들, 그 양반들이 남겨둔 풍류 처는 이리도 아름다운가. 신선놀음하던 곳에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간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의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의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과 평해의 월송정이 관동팔경이다. 조선 성종이 당시 이름 있는 화가를 시켜 “팔도를 돌아다니며 활쏘기 좋은 정자를 그려오라.” 명했다. 화공은 영흥의 용흥각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다. 성종은 “용흥각의 부용과 양류가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며 월송정과 그 주변의 경치에 감탄했다 한다. 용흥각이 어디인지 검색을 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월송정은 고려 시대 왜구의 침략을 살피던 망루였다. 조선 중기에 박원종이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망루를 정자로 세우게 됐다. 이후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반열에 들면서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유기`에? 의하면 평해 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되었다 한다. 달밤에 송림 속에서 놀았다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고 했고,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 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했으나, 전해오는 각종 자료에 의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 불리고 있다. 달밤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교교한 달빛과 일체가 되다 보면 저절로 시인이 되리라.퇴락한 것을 1933년에 이 고을 사람 황만영, 전자문 등이 재차 중건하였고 일제 말기에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철거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후 1969년에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의 후원으로 2층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으나 원래의 모습과 달라 해체했다가 1980년에 현재와 같이 다시 세웠다. 이 정자는 사선이라고 불린 신라 시대 영랑, 술랑, 남석, 안상, 네 화랑이 경주를 떠나 전국을 주유하며 심신을 달랜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소나무 숲에 와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밤이면 달빛을 즐겼다. 화랑으로서 웅지를 품던 도장이 아니었을까. 많은 소나무와 십 리가 넘는 명사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송강 정철도 유람하다 이 곳에 들러 읊은 시에서 “소나무 뿌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꿈속에 신선을 만나 술 얻어 마시고 놀았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월송정을 나오면서 입구에서 만난 소나무 숲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누리상을 수상한 곳이라고 한다. 평해 황 씨 종중 숲인데 20m도 더 되는 늘씬한 소나무들이 천여 그루나 있다. 신선한 공기가 찌든 영혼을 말갛게 한다. 평해 황 씨 시조단도 아름드리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아름다운 정원이 소왕국 같다. 울진이 낳은 애국지사 황만영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황 씨 시조 단 앞에 건립한 기념비가 있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황만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차장에 내정되었던 독립 운동가이다.자전거를 타고 여행 중인 연인이 황 씨 시조단 정원에서 사진을 부탁한다.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어디서 만났었던 것 같은 그 장면, 몇 컷을 눌러주고 내 카메라에도 슬쩍 담아 본다.사랑하라, 오늘만 같이.

2014-11-07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마실

상주 박물관 가는 길은 볼거리가 많다. 전통의례관 옆, 의우총(義牛塚)은 동화책과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의로운 소 무덤이다. 임봉선 씨가 키우던 암소 누렁이가 갑자기 고삐를 끊고 자취를 감췄다. 마실을 뒤지던 소 주인은 김보배 할머니 묘소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누렁이를 발견했다. 생전에 김 할머니는 누렁이를 따뜻하게 보살폈다. 사랑을 받았던 누렁이는 자신을 돌봐준 이가 죽자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인이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누렁이는 김 할머니 집에 가서 문상하듯 영정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주들은 문상 온 누렁이에게 막걸리, 두부, 양배추를 대접하고 예를 갖췄다. 소가 죽자 사벌면 주민들이 장례식을 치렀다. 누렁이는 꽃상여를 타고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상주박물관 옆에 묻혔다. 누렁이는 명실상감 한우 홍보관`에 박제된 모습으로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부끄럽다. 인정에 연연하지 않고 의리나 도덕을 내세우던 시대의 호걸들은 영웅문이나 무협지에서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의롭다, 의리를 지킨다.`는 말이 객 같다.잠시 박물관을 둘러보고 국제 승마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차장 가는 길에 마당(馬堂)이 있어 잠시 들러본다. 마당제는 말과 관련된 신에게 드리는 제례의식으로서 천사지신, 선목지신, 마사지신, 마보지신의 4신위를 모신다. 조선 시대에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임금이 주관하던 큰 제사였으나 1909년 국운이 기울던 때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지되고, 이로부터 약 100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지난 2011년 학술대회 등을 거쳐 부활됐다. 상주시에서는 말 문화의 대중화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고 말 산업의 성장을 기원하고자 매년 10월 12일에 제(祭)를 봉행하고 있다.말은 제왕 출현의 징표로서 초자연적인 세계와 교통하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왔다. 혼인 풍속에서 신랑은 백마를 타고 가는데, 이것은 말과 관련된 태양 신화와 천마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말은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남성을 의미한다. 기마병은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다 하여 말은 씩씩한 무사를 나타내며, 말띠에 태어난 사람은 웅변력과 활동력이 강하여 매사에 적극적이라 하였다. 십이지에 말은 남성 신을 상징한다.마방 앞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살피다 `순심이`가 눈에 들어왔다. “순심이는 심술보 할매라 불러요. 승마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는데 할 일은 다하면서도 생색을 내고 투덜거려요.” “이름이 순심이라 순할 줄 알았는데, 순해지라고 지은 이름인가 봐요. 허허.” “얘들도 사람을 간봐요. 못됐죠. 사람이 만만해 보이면 함부로 날뛰거던요.” “말들이 그럴 땐 어떻게 하나요.” 사람이 말보다 위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단호하게 훈련을 시켜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요.” 말은 잘못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쓸까. 채찍으로 엉덩이 몇 대쯤 맞겠지.“교관님은 말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요.”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말을 타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어릴 때는 상처를 많이 받아서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었어요. 가난해서 마음대로 승마할 수 없었고 여자가 말 타서 뭐하겠냐는 시선 때문에 고민도 했지요.”가난해서 꿈을 접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 시대에도 그랬고 내가 살던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건 성차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무시당하던 여자들이 상위 1%의 위치에 있다. 일하는 데 있어서 성차별은 국가 발전에 저해만 될 뿐이다. 가부장제란 감옥에서 아직도 탈출하지 못하고 사는 여성들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후진성이 씁쓸하게 한다.빈 마방이 많다. 꽤 넓고 깨끗하다. 말들의 호텔이라고 한다. 대회 때 멀리서 오는 말들의 여독을 푸는 장소로 마련된 것일 게다. 말들을 먹이고 재우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고 하니 개 팔자만 상팔자가 아니고 말 팔자도 사람 팔자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말을 탄 지 28년 정도 되었지요.” “기억에 남는 것이 있으면 얘기 좀 해주실래요.” “승마 인생에서 가장 슬픈 때도 있었지요. 파비오 드 피오레란 말과는 솔메이트였지요. 올림픽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연습 도중 심한 부상을 당했어요. 마방에서 먹고 자며 고통을 같이했지요. 그랬던 메이트가 팔려 갈 때는 뒷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방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가슴이▲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먹먹해지고 뻥 뚫린 것 같은…. 더 충격적인 것은 내가 미국에 잠시 나가 있는 동안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라구요.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져서 말을 돌볼 수가 없더라구요. 메이트 생각이 자꾸 나서….”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 낯설지 않다. 동물들도 죽음에 대한 애도, 자존심, 부끄러움, 사랑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동물의 정이 어쩌면 사람보다 더 끈끈한지 모른다. 쉽게 사랑했다 금방 돌아서는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기억의 주머니 속에 가시 같은 슬픔 없으랴. 그중에서도 별리의 아픔만큼 오래가는 것은 없다. 그랬던 아픔도 시간이 흐르면 소멸하게 되어 있다. 면역이 생기고 상처는 가라앉는다. 인생, 그렇게 가는 거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2014-10-31

사벌국으로 가는 길

논두렁을 덮고 물결치는 은빛 억새들의 군무가 장관이다.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들녘, 가을이 지닌 풍경이다. 난데없는 강풍이 몰아친다. 몸조차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지만 억새는 부러질 듯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기품을 지녔다. 매딥매딥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림, 한 계절이 가고 있다.나비 부인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더니 보란 듯이 다른 길로 안내한다. 게으른 주인에 대한 경고가 따끔하다. 자칫 경북대학교 상주 캠퍼스에서 내 젊은 날의 추억만 회상하다 돌아올 뻔했다. 길을 잃으면 길을 발견한다고 하지 않던가. 길이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헤매다 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된다. 인생은 헛길로도 가봐야 바른길로 갈 수 있는 지혜도 생긴다. 시행착오는 돌아보면 삶의 조각으로 나름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상주시 사벌면 마실을 찾았다. 문화해설사를 운 좋게 만났다. “우선 상주에 대해 기본적인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상주는 쌀, 누에고치, 곶감이 유명해서 삼백의 고장이라 불러요.” “질문해도 되나요. `삼백`의 `백` 자는 `흰 백` 자인 것 같은데 곶감이 흰색인가요.” “아, 그거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곶감이 분이 나면 하얗게 되잖아요. 아마도 그래서 선조들이 `흰 백` 자를 썼지 싶네요. 상주는 보다시피 들이 아주 넓죠. 당연히 농업이 터전이었겠죠. 경북 농업의 중심지라 볼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구요. 경주와 상주 고을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경상도라 지었다는 건 다 아시죠.”상주의 옛 지명은 상산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으나 185년 사벌국으로 독립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 되어 상주로 고쳐 군주를 두었다. 낙동강은 사벌국의 도읍이었던 낙양에서 유래했다.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지역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경……주.” “아니에요, 허허, 모르겠죠. 상주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전사벌왕릉의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 사람이죠. 그래서 상주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해요.” “우와 그러면 제 조상의 뿌리도 상주네요. 전 고령가야 후손인데요. 허허.”사벌국은 사벌면 화달리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삼한의 소국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사벌국의 옛 성이 병풍산에 있는데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 성에 웅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 그러자 석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상주 지명유래 총람에선 상주의 사벌이나 경주의 서벌은 수읍(首邑)을 뜻한다고 했다. 사벌을 동쪽 나라 또는 동쪽의 머릿고을로 풀이한 학자도 있다.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에 따르면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에 있으며 성 옆에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예로부터 사벌왕릉이라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전사벌왕릉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25호이다. “사벌국은 낙동강과 인접해 있고 평야가 비옥해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해요. 주변 국가와 쌀이나 농산물을 교역했을 가능성도 보이며 경제적으로도 부강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하죠. 고고학계는 사벌국이 부족국가 형태에서 멸망까지의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에서 4세기대로 보고 있어요.”“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과 낙랑군의 성립 등 불안정한 국제 정세가 농경사회를 사벌국이라는 국가 체제로 발전시키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죠.” “사벌국은 신라에 패했잖아요.” “비록 사벌국은 멸망했지만 사벌주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전진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주를 임명할 만큼 큰 비중이 있었던 소왕국이었어요. 사벌주는 수도인 경주와 버금가는 대 세력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여러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어요.” “궁금한 거 없나요.” “사벌왕릉 앞에 붙은 전(傳)자는 무슨 뜻인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전설상 왕릉으로 전해오나 정사에는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1672년 목사 이초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 묘소가 사벌왕릉이라고 일러줬다는 전설도 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후삼국 시대 수많은 호족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잔잔히 능 위로 흐른다. 낯선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역사 속 또 하나의 왕을 보고 간다. 행운을 거머쥔 자와 때를 얻지 못한 자의 엇갈린 희비가 후둑 밀려든다. 나는 나그네살이를 마감할 때 나에게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남았는가를 물어보려 한다. 능 옆으로 상산 박 씨 재실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117호 3층 석탑이 있다. 둔진산 남쪽 부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이곳에 남향 사찰이 건립되었던 가람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추측설이 있다. 탑기단 위에 목 없는 불상이 전율을 일으킨다.성불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미완의 미학이라는 듯 고요한 가르침을 준다. 찬란했던 영화도 치욕스러웠던 과거도 무덤 속 주인은 알 리 없다. 그저 초원에서 곤히 잠자고 있다. 여행은 길 위의 학교라 했다. 가보지 못한 곳도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도 발을 디디면 산지식이 된다. 멈추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여행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상주에서 내 뿌리를 찾았다. 영혼이 넉넉해진다.

2014-10-24

옥함 속에서 나온 잉어 이야기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누가 끌지 않아도 달려만 가고 싶은 길, 가을 들녘이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곳에서부터 높고 부유한 곳까지 내 애마는 말없이 동행한다. 행장을 꾸리지 않고 가다가 지치면 아무 곳에나 애마를 세워두고 휴식을 취한다. 이게 내가 여행을 즐기는 법이다. 특히 가을은 빈 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계절이라 더 가볍게 떠난다.문학 하는 동료의 집으로 여럿이 소풍을 갔다. 농수로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별마루 정자에 드러누워 본다. 한숨 자고 나면 모든 피로가 풀릴 것 같다. 어느 왕가의 별장보다 부러울 게 없다. 떡순이가 으르렁거리며 낯선 객을 대한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민한가 보다. 어미 개는 연신 새끼를 핥고 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새끼 사랑이다. 동료들은 아이들과 도토리를 줍고 한쪽에서는 표고버섯을 따느라 배고픔도 잊었다. 도심에서 맛보지 못한 농촌 체험에 연신 웃음꽃이다.동료는 꼬마 손님에게 줄 고구마를 굽기 위해 가을볕보다 따가운 군불을 지핀다. 장작더미 안에서 타닥타닥 고구마 익어가는 소리가 난다. 뜨거운 불길이 고구마를 휩싼다. 동료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가슴에서 꺼져가던 불씨가 동료의 뜨거운 정(情)에 다시 살아나는 오후이다.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넓은 마당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미꾸라지 튀김에 곁들어 먹는 복분자 술 한 잔은 수라상보다 더 푸짐하다. 오붓하게 느껴보는 가을 향연이다.어쩌려고 그러는지 집 주인은 귀한 프로폴리스까지 주려 한다.“ 요렇게 그저 퍼주면 어찌 산데요.” “지천에 늘린 것이 다 거둘 것이고 머걸 것인데 무신 걱정이요.” 동료의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시간. 입속에 혀만 살아 있는 사람을 보다가 가슴에 등불 안고 사는 사람을 만나 훈훈하다. 산 그림자가 지붕에 살짝 내려앉았다. 가을의 짧은 해를 아쉬워하며 일행은 목적지로 향했다.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관평 마실이다. “기계란 어감이 왠지 공장이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포항과도 잘 어울리고….” “언제던가, 이 마실 태생의 시인이 쓴 신문인가 책인가에서 봤는데요. 기계는 형산강의 지류인 기계천 주변에 옛날부터 구기자가 많이 자란다 해서 구기자 기(杞)자와 시내 계(溪)자를 써서 `기계`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글고 봉계리는 봉좌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랍디다. 봉계리는 관평이라고도 부른다네요.” “기계라 쓰지 말고 구기자 면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순우리말로 좋지 않나요.”고려 말 경주 부윤으로 있던 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분실된 태사의 묘를 찾았다 하여 관평(官坪)이라 불렀으며, 물 대기 좋은 들이라 하여 관평(灌坪)이라고도 한다. 관평은 고려의 개국 공신인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의 묘가 있어 후손들이 관청을 설치하고 관평(官坪)이라 했다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우리 일행은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을 모시는 봉강재로 향했다. 봉강재는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201호이며 1752년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추향제가 열리며 전국에서 사, 500 명의 후손이 운집한다.`조선씨족 통보`와 `용연보감`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의 파주군 파주면 파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에 옥함 하나가 떠 있는 것을 근처에 살던 한 노파가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오색 찬연한 깃털에 쌓인 한 옥동자가 들어 있어서 자세히 보니 두 어깨에는 일월 모양의 붉은 사마귀가 나 있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여든 한 개의 비늘이 돋아 있었다.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의 일곱 개로 된 점이 있고, 손금의 형상은 尹자와 같았으므로 성을 윤씨로 정하였다. 용연에서 나온 옥동자가 장성하여 윤신달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화이다.그는 왕건의 막료가 되어 고려의 건국 및 후삼국을 통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삼국통일 후에 벽상삼한익찬공신의 서훈과 삼중대광 및 태사의 관직을 받았다. 파평 윤씨 가문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 시조인 윤신달이 연못의 옥함에서 나왔을 때 여든 한 개의 비늘이 나 있어서 잉어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5세손인 윤관이 함흥 전투 중에 거란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때 잉어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설이 있어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시조 설화를 보면 대부분이 난생설화가 많은데 잉어는 특이하네요. 하하, 상상력에서는 선조들이 한 수 위인 것 같아요.” “시조 설화는 거의가 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영웅이 많잖아요. 그리고 고난을 겪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공통점이 있구요. 우리나라 민족성을 닮았지 않나요. 선조들은 설화를 통해서도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아요” “시조 신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우리나라가 가계나 혈통을 중요시했다는 것도 알 수 있네요. 허구인줄 알면서도 전통을 지키고 있는 민족성도 대단하지요.” 이 마실에 흐르는 설화에서 우리 민족은 족보를 귀중하게 여기고 문중을 중시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분홍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코스모스가 손을 흔든다. 내 인생 화폭에 동료들의 사랑을 담았다. 함께 해서 더 풍성한 가을 소풍이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과 이리 부딪히고 저리 보듬으며 손잡고 가는 것이 아닐까. 마음 붙일 곳이 하나 더 늘어났다.

2014-10-17

경주시 건천읍 신평2리 마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빠알간 옷으로 단장한 고추가 가을 낮잠을 즐기고 있다. 넓은 주차장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은 느티나무 밑에 앉아 아들, 딸 자랑을 하다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얘기로 가을 볕에 얼굴 타는 줄도 모른다. “송일국 아 왜 그……누구제? 차만 보면 날리지기는 아. 있자나 밍국인가?” “아이다, 니가 말하는 아는 만센기라” 서로가 좋아하는 애들 얘기에 웃음꽃이 핀다. “고곳들 나올 시간되면, 요 안잤다가도 텔레비 볼라고 얼릉 들어가지요.”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얘기 같다. 숫기 없는 코스모스는 끼어들지 못하고 연신 고개만 끄덕인다. 들깨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 온다. 뉘 집에서 타작을 하는가 보다. “부산성 가려는데 여기서 얼마나 가야 하나요.” “요길로 쪽 올라가면 되요.” “차는 올라갈 수 없나요.” “차 가지고 유학사 절 아패다 대노고 걸어가요”차마 `여근곡`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부산성 방향을 물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은 같기에. 아주머니의 말대로 `요길`로 쪽 올라가 본다. 여근곡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앞에서 차라도 올까봐 간이 졸아 들었다.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다가 혼이 날 뻔 했다. 막상 올라가니 주차할 곳도 없다. 출입금지 팻말을 무시하고 유학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절 마당은 텅 비어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등산객이 없다. 혼자 산을 오르기도 뭣해서 절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침 부부가 오기에 얼른 따라 붙었다.경주시 서면 신평 2리 마실은 `섶들`, `숨들`로 불렸었다. 아마도 `여근곡`이 있는 마실이라 그렇게 불렸지 싶다.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된 부산성에 올랐다. “간 봄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이까.” 죽어서나마 죽지랑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득오의 탄식이 새어 나오는 듯하다. 선덕여왕 최후의 장면과 동이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척살되었던 촬영 장소인 마당바위다. 아래로 넓게 펼쳐진 고랭지 채소밭이 보인다. 허무의 바다 같다.오봉산에 볼록 솟아 있는 작은 봉우리가 여근곡이다. 전체 모양을 둥글게 싼 부분은 소나무 숲으로 덮여 있고, 그 안쪽은 관목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빽빽한 관목 숲 가운데 샘이 있다. 이 샘은 지금 마실 상수도의 수원지이다. 이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난다고 믿었다. 타동네 총각들이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기 위해 몰래 이 골짜기에 들어와 작대기로 휘저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진다. 마실 사람들은 이 곳을 성역으로 생각하고 나무를 베거나 오물을 버릴 수 없고 잡인의 출입도 금했다. 백제군이 여근곡 인근인 건천 땅에만 오면 이상하게도 힘을 쓰지 못한 것과 한국전쟁 때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여근곡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이 근처 산에 큰 불이 난 적도 있었는데 여근곡만 불길을 피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여근 모양의 지형을 명당이거나 흉한 자리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산세가 사람이 다리를 벌린 모습이면 흉한 곳이며, 정숙하게 오므린 모습이면 명당이라고 한다. 흉한 산세 아래에는 여자들이 바람기가 거세지고 남자들은 양기가 위축된다고 믿었다. 지금은 마실 앞 여근곡이 바로 보이는 곳에 국도, 철도, 고속도로가 나있다. 조선조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재수가 없다고 하여 이 근처를 지날 때는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새로 부임하는 관리들이나 싸움터에 나가는 장수들도 일부러 멀리 안강 쪽으로 돌아 경주나 그 밖의 임지나 전쟁터로 갔다고 한다.이 마실 주민들은 `여근곡` 반대쪽에 마주보는 산을 `남성 산`으로 설정하고 남근을 세웠다. 지나가던 소금 장수가 그 모습을 보고는 호통을 치며 막대기로 그 돌출한 부분을 내리쳤다. 너무 세게 쳐서 돌출 부분이 잘린 채 앞산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하는 전설이 흐른다. 현재 철도와 고속도로 중간에 길게 누운 언덕이 그때 잘린 남근이라고 한다.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事)중 하나인 `여근곡` 설화다. 선덕여왕 5년 때의 일이다. 영묘사 옥문지에 한겨울에도 개구리들이 사나흘 시끄럽게 울어대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흉조라 여겨 왕에게 아뢰니, 왕은 알천과 필탄에게 병사를 이끌고 서쪽 외곽의 여근곡에 적군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곳에는 여왕이 일러준 대로 백제 군사 500여명이 숨어 있었고, 모두 소탕하게 되었다.신기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여왕께 여쭙게 되었는데, 여왕이 대답하기를 “개구리가 성난 모습으로 울어대는 것은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지 근처에서 울어댔으니,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하는 것으로 `여근곡`을 가리킨다.여자는 음(陰)이니 숨어 있는 것을 말하며 음은 그 색깔이 백색이고 백색은 서방이므로 군사는 서쪽에 있음을 알 수가 있었오.” 선덕여왕의 지혜에 모두 감탄하였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선덕여왕은 지형과 지세를 살펴 개인은 물론이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등이 흥건히 젖었다. 오랜만에 올라본 산행이라 그러하리라. 가을 서정을 담을 가슴이 하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남자의 가슴도 가을엔 애연해 지는가. 아라리는 너 탓도 내 탓도 아닌 가을바람 탓이로다. 달리고 달렸던 삶이 자연 앞에 무의미해진다. 고개 숙인 벼 이삭의 목덜미를 쓸어준다. 가을 들녘에서 바라보는 황혼은 황홀하다.

2014-10-10

양반문화·천년고찰 조화이룬 `금당맛질 반서울`

추수를 앞둔 벼들이 황금들판을 이루었다. 여물지 못한 인격도 가을엔 농부의 마음이 된다. 서로의 일상을 염려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지인과 만나 옛길을 걸어본다. 처음 보는 남정네를 만날 때처럼 가슴이 뛴다. 우정도 곰삭아야 맛이 깊은가 보다.돌담 너머로 초가집이 보인다. “엄마” 부르면 금방이라도 버선발로 달려 나와 덥석 안아줄 것만 같다. 굴뚝에선 연기가 몽개몽개 솟아오른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 나오던 동생의 입이 까맣다. 아마도 구운 감자를 까먹었나 보다. 그 꼴이 우스워 깔깔거렸었는데 지금은 별이 되었다. 갑자기 그 아이가 보고 싶다.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따 담고 있다. 늙은 호박과 애호박이 섞여 있다. “호박으로 뭐하시게요” “늙은 호박은 나돗따가 호박범벅 해먹을라꼬. 양대콩 놓고 찹쌀가루 풀어 써노만 우리 영감이 억시기 좋아하니더. 겨울밤이 길자니껴. 주전부리 업슬 때 속을 파내 전을 부쳐 머도 마신니더. 애호박은 풋고추 썰어 넣고 전에다 막걸리 한잔하면 죽이니더. 이런 낙기라도 있어야 살제, 어째 사니껴. 젊은 아지매들은 그런데 어데서 왔니껴. 호박 한디 주만 가주가실라이껴.” 인정 넘치는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를 뒤로 하고 마실을 둘러본다. 전 냄새가 폴폴 나는 것 같아 침이 꿀꺽 넘어간다.경상북도는 예향의 고장이라 유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고택이 많다. 용문면은 예천 서북단의 소백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을 지켜낸 고택은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준다. `금당고` 혹은 `금곡`으로도 불리는 금당실 전통 마실은 감천 문씨가 개척했고 그의 사위 박종인과 변응영이 정착한 곳이다. 정감록에는 이곳을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수 있다는 십승지의 한 곳으로 지목했다. 지형지세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옆으로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연화정수형으로 연못 속에 핀 연꽃과 같다 해서 `금당실`이라 불렀다. 병화와 질병, 기근이 없다고 하니 여기서 목마른 삶을 축여도 좋겠다.이 마실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다 큰 내(川)가 없어 무산되었다. 조선시대, 명문 권세가들이 이곳에 거주함으로써 벼슬아치들이 많이 찾았는데 유교와 양반 문화가 번성해 흡사 서울 같았다고 한다. 금당실과 맛질 마실은 서로 이웃해 있으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경상도의 대표적인 양반 마실이다. `금당맛질 반서울`로 불리며 충효 정신과 자연 환경이 아름답다. 한 때는 오일장이 개최될 정도로 중심지이기도 했다. 벼농사 외에 양봉, 양파, 마늘, 고추, 상황버섯, 농, 특산물도 생산 판매하고 있다.금당실 마실은 조선시대 옛 가옥과 돌담길이 무려 7km나 된다. 미로 같은 길을 걸으며 쉼표 하나씩을 콕콕 찍어 본다.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 지인과 나는 멀뚱히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돌아서 왔던 길로 가다보니 또 다른 길이 나온다. 인생길도 이러하지 않던가. 막힌 것 같으나 뚫려 있고 없는 것처럼 보이나 어딘가에는 길이 있어 가던 걸음을 가지 않던가. 원래 가고 있던 길보다 더 좋던 나쁘던 출구를 발견한 기쁨에 감사하고 주저앉지 않아서 다행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다른다는 깨달음도 얻는다.방풍림이라 할 수 있는 `쑤`라고 불리는 마을 숲은 800m 가량 되는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으로 금당실 마실의 자랑거리이다. 금당실 송림은 수해 방지와 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이 숲은 구한 말 혼란을 겪는다.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처형되는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되어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었다. 이어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 구출 비용 마련을 위해 또 나무가 벌채를 당하자 1895년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하여 왔다고 한다.이 마실 주변엔 볼거리가 많다.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였던 병암정이 있다. 가파른 암벽 위에 지은 병암정은 한 폭의 그림이다. 고종 때 이유인이 금당실로 낙향하여 살면서 병암정을 `옥소정`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하였다. 이유인은 구한말 중인 출신으로 고종과 명성왕후의 총애를 많이 받아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항일 운동가이며 덕수궁을 맡았던 건축가이기도 하다. 입신출세와 재산이 많아 수많은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예천 권씨 문중에서 옥소정을 매입해 `병암정`이라 개칭하고 권원하 선생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금당실 마실에서 차로 십분만 가면 용문사를 만난다. 대장전을 비롯해서 팔상도, 천불도 등 보물이 9개나 있는 천년 사찰이다. 국내에는 하나밖에 없는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윤장대는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보물 684호이다.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만나기 위해 산 입구에 도착했다. 골짜기에서 용이 나타나 태조를 맞이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이라 짓고 사찰을 용문사라 했다는 전설이 흐른다. 뒤를 돌아다본다. 지인과 내가 잠시 머물렀던 용문면 마실도 역사 속으로 묻힌다. 내 인생에 찾아온 소중한 인연과 함께 해서 기쁨이 더 크다. 종자기와 백아의 지음절현의 우정은 아니더라도 서로가 내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비우려고 떠난 여행길인데 어깨가 무겁다. 이 마실의 역사와 유산을 듬뿍 담아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소중한 한 가지를 더 짊어졌다. 지인의 아픔이다.

2014-10-03

도공의 혼·숨결 작품에 담아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계절. 내가 쓸쓸할 것 같아서 사 들고 왔다는 지인의 국화꽃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담이라도 훌쩍 넘어 나락 익는 냄새라도 맡고 와야 할 것 같다. 가을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운 건 그가 주는 상처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문경은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고 내 어린 날 추억이 있어서 그립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면 신발 벗어들고 쫓아 나와 반겨 줄 이는 없다. 모두 이 모양, 저 모양 사는 것이 바쁘다. 시간을 내서 차라도 한잔 나누는 친구는 정말 고맙다. 친구를 만날 때면 주머니는 되도록 내가 여는 편이다. 얼마 안 되는 찻값이나 식사비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 살아오면서 내가 지키는 철칙이다.문경 능이족살찌개 집에서 지인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토암 김성기 도예가의 자제분인 토암 2대 김대진 선생이다. 도예가와는 두 번째 만남이다.능이족살찌개 속으로 가을이 익는다. 다른 건 먹지 말고 검은 것만 골라 먹으라 한다. 쫄깃하면서도 향이 특이하다. 아직까지 인공재배가 되지 않는 버섯 중의 왕이라 불리는 능이버섯이다. 다량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고, 영양 가치와 약용으로 인기가 높다.족살은 족발에 붙어 있는 살을 말한다. 족살에 능이와 두부를 넣고 끓인 것이 능이족살찌개이다. 문경은 관광지라서 그런지 특이한 음식이 많다.관음리 마실은 하늘재 바로 아래에 자리해 있다. 수백 년 전부터 생활도자기를 생산하던 곳이다. 안동 김씨 후손이 살던 곳으로 선조들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피해 은신하며 생계수단으로 도자기를 굽던 것이 대를 잇게 되었다. 지금도 자손들이 대를 이어 도자기를 빚고 있으며 오래된 가마터도 둘러볼 수 있다.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더러 있어 나들이하기에 좋은 마실이다.그중에서도 관음리에 있는 뇌암요는 진사, 천목, 분청사기로 유명하다.김대진 선생의 부친인 토암 김성기 선생이 뇌암요의 창시자이다. 문경읍에서 관음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황정머리가 나온다. 우회전해서 2km 정도 가면 뇌암요를 만날 수 있다. 뇌암은 꼭두바위란 뜻이다.김성기 도예가는 9세에 입문하여 전통 도자기의 생산과 전수에 평생을 받쳤다. 이 시대 마지막 전통 민요 도예가이다. 단순히 옛것을 본뜨는 데 그치지 말고 계속 연구, 개발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전에 말씀하셨다.우리의 전통 도예가 발전하려면 책에 나와 있는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작품도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의 결과였다고 말한다.한평생을 닦아온 부친의 기술을 고스란히 김대진 선생이 전수받았고 뇌암요의 2대 맥을 이어가고 있다.김대진 선생은 군대 제대를 하고 경찰관이나 직업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1989년부터 가업을 계승하게 되었다. 도자기 유약 진사, 천목을 특허 출원하였으며 각종 공예대전에서 많은 입상을 한 경력이 있는 도예가이다.감사패 및 주간지에 게재되는 등 개인전을 비롯하여 오사카 문경 도예 9인전을 열기도 했다. 가장 전통적인 한국미를 지닌 도자기 명장으로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가마 옆에 동그란 돌이 많이 쌓여 있다. 일본말로는 `사야`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개비`, `개피(蓋皮)`라 불러요. 다완을 한 개씩 놓으면 공간을 많이 차지하잖아요. 그래서 개피를 놓고 다완을 얹어요. 또다시 개피를 넣어 폭 포개는 그라요. 그러면 한꺼번에 많이 구울 수 있어서 연료비를 절감해요. 개피는 탁한 불기운을 막아주는 역할도 해요.”“뇌암요의 특색은 무엇인가요.” “일반 백자와 달리 진사, 천목, 분청사기가 많지요. 뇌암요는 천연재료인 재와 혼합해서 사용해요. 유약은 불에서 녹으면 흘러내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는 화공 약품으로 처리된 것을 사용해요. 그래서 이중 색상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거라요. 뇌암요는 천연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약이 흘러내리는 그대로의 자연미가 있다고 볼 수 있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뇌암요 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요.”진사는 도자기 유약 중에 동을 환원 소성하면, 적색이 되고, 산화 소성하면 녹색이 된다. 그때 동을 환원 소성해서 나온 적색 도자기를 진사 도자기라고 말한다. 기원은 고려 시대 청자를 환원 소성하면서 함께 쓰였던 기법이다.자연에서 얻은 유약으로 빚어서 그런지 진사의 불그스름한 빛깔은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천목 설경 항아리에는 눈꽃이 피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한국인에게 가장 친근감이 가는 백자의 은근한 매력도 놓칠 수 없는 미학이다. 도예가의 맑은 기운은 자연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도공의 혼과 숨결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조화로움을 더한다. 김대진 선생이 빚은 천목 다기에 녹아든 다향이 그윽하다. 도공의 혼이 실려 맑고 은은하다. 일렁이던 번뇌도 가라앉고 욕망도 잠든다. 이제 뇌암요의 가업을 계승할 3대인 김명한 씨도 군 복무를 마치고 강원대 도예과 3학년에 복학 중이다.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는 그에게 응원을 보낸다.자연을 연주하는 도예가와의 만남에서 건조한 내 삶을 돌아본다. 한 번쯤 이런 산속에 푹 파묻혀 자연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풀어놓고 싶다. 창밖으로 보이는 늦게 핀 사과 꽃도 도공이 빚어놓은 예술품 같다. 자연산 호두 한 주먹을 얻어서 돌아오는 길, 문경의 인정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2014-09-26

구룡포 골목길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정겹다. 비를 맞으며 골목길을 꽉 메운 사람들이 보인다.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낯선 여행자들과 얘기도 나누며 달랜다. 우리 일행도 간이 의자에 앉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다. 저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삼십여 분을 기다려도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을까. 까치발을 하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허름한 탁자 네 개에 커다란 솥이 올려 져 있다. 김치하고 멸치에 고추장만 있는 소박한 밥상이다. 시장함에 침이 넘어간다.지인은 구룡포에 오면 세 가지 음식은 꼭 먹어 봐야 한다고 했다. 구룡포 초등학교 앞에 있는 `철규 분식집의 찐빵과 단팥죽`, 그리고 `까꾸네 모리국수`라고 했다. 육지 태생이라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 때문에 지인은 노심초사한다. 안 맞으면 막걸리로 배를 채우자며 낄낄거렸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차례까지 오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얼른 쫓아가서 합석 좀 하자고 했다.오랜 기다림도 막걸리 한잔에 순해진다. 막사(막걸리에 사이다를 탄 것), 꿀막(막걸리에 꿀을 탄 것)도 구막(구룡포 막걸리)의 시큼한 맛은 따를 수 없다. 오관의 마디가 부드럽게 풀린다. 존재감 없는 인생 같이 국수가 솥째로 나왔다. 사십여 년 전의 어느 뱃사람이 앉았을 이 자리에서 나도 주린 배를 채운다. 다행히 고춧가루와 마늘로 비린내를 잡았나 보다. 해물 칼국수나 진배없다. 얼큰하고 시원하다. 사람들은 칼국수 속의 생선을 건져 올리며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웃음을 짓는다. 좁은 식당에 함박꽃이 핀다. 솥째 나온 국수의 푸짐한 양만큼이나 행복해 보인다. 합석해도 불편해하지 않고 막걸릿잔을 건네는 인정이 있어서 좋다. 고운 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따스하다. 까꾸네 모리국수가 있는 마실 풍경이다.`모리`란 뜻이 궁금하던 참인데 마침 주인이 다가온다. 칠순이 되어 보이는 이옥순 할머니이다. “처매는 이름도 업서서 그냥 국수라 했서요. 생선과 국수를 석가가꼬 범벅해서 옛날부터 머겄어요. 배고픈 시절이다 보이 별미였지요. 이 음식을 조아하던 분드리 이름도 업시 묵을게 아이고 오늘은 이름을 짓자, 이래 가지고 모여 안자 연탄불에 끓인 걸 드시면서 여러 사람이 모디 가지고 모다서 먹는다고 모디 국수라 카자 하던기 모디 국수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모리국수로 변했어요.”뱃사람들이 어판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을 가져다주며 먹을 것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 모리국수의 시초가 되었다. 제철 생선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잔뜩 넣은 모리국수는 출출한 배를 달래주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뱃사람들의 고단함도 탁배기 한 사발과 모리국수 한 그릇이면 새 힘이 돋았을 것이다. 배고프던 시절, 조금이라도 양을 늘려서 많은 사람이 먹기 위해 만든 것이 별미가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여행자들은 포항에 오면 통과의례라도 하듯 이곳을 거쳐서 배를 채우고 간다.“까꾸는 또 무슨 뜻인지요” “허허 까꾸는 우리 집 막내 지집아 별명이지요. 뱃사람드리 밥무러 왔다가 어린아가 울고 있으이 까꿍 하며 어르던 것이 까꾸가 됐어요. 그담부터 사람드리 까꾸네 칼국수라 불렀지요”고기 반 물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했던 동해안 최고의 어장 구룡포가 지금은 쇠락해서 인구 1만 명이 겨우 넘는 소읍이 되었다. 국수를 들고 계시던 나이 지긋하신 분도 고향이 구룡포라고 했다. “1930년 초부터 구룡포는 최고의 전성기였죠. 사람과 돈이 넘쳐났어요. 이 질거리를 짝 올라가면 양가에 꽁치, 오징어가 산더미 거치 쌓여 있었어요. 구룡포는 개까지 지폐를 물고 댕길 정도라는 말이 있었죠. 어획량이 많아 그만큼 풍족했었다는 말이죠. 그러던 거시 일제수탈의 거점지가 되었지요.”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어느 거리에 서 본다. 한일역사의 아픈 과거가 남아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근대 일본가옥 거리이다. 원래 마을이 없던 곳이었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성한 구룡포는 근대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던 일본의 마실 오다 어촌, 오카야마 현의 어부들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동해 연안의 풍족한 어자원을 찾았다.구룡포를 발견한 그들은 9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꿈꾸며 이곳에 정착했다. 주소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들만 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구룡포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은 일본 어부는 도가와 야스브로와 하시모토 젠기치였다. 이들은 구룡포를 기점으로 선어 운반업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가난한 일본인에게 새 시대, 새 삶을 열어준 그들은 구룡포 공원 올라가는 계단에 시멘트로 덧칠된 채 비(碑)로 서 있다. 여행자들은 이 공덕비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왜곡된 역사 앞에서 후대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고 교훈으로 삼을까.▲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하시모토 집 앞에는 느린 우체동이 있다. 큰 우체통 안에 있는 편지는 실제로 보내진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까. 사춘기 때, 부모님 몰래 주고받던 연애편지가 생각난다. 우체부 아저씨만 기다리며 동구 밖에 나가서 서성대던 일, 지금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느린 우체통이니 언제 당도할지 모르지만 그 아이에게 안부를 전해본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때론 힘이 된다. 연애는 편집된 화면이므로.

2014-09-19

방천시장을 울린 추억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김광석 노래가 귓전에 울려 퍼진다. 방천시장은 추석 전인데도 한산하다. 방앗간 열린 문틈으로 파리 몇 마리가 넘나든다. 졸음을 쫓고 있는 할머니의 고개가 무거운 오후이다.방천시장은 경대병원역 3번 출구로 나와 수성교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다. 일본, 만주 등지에 피해 있던 전재민들은 해방이 되자 여기에 모여들어 장사를 시작했다. 먹고 사는 방편으로 터를 잡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방천시장 남쪽 10m 지점에 죄수들의 채소밭과 벽돌 굽는 공장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은 찾을 길 없다.방천시장은 1960년대부터 싸전과 떡 전으로 유명세를 탔다. 번성기에는 100여 개의 점포가 즐비했던 대구의 대표 재래시장 중 하나였다. 인근의 경산, 고산, 청도 사람들까지 이 시장을 이용했을 정도의 규모였다.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60여 개의 점포만 남아 있다. 재래시장의 침체를 가져온 건 인터넷도 한몫을 한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집으로 배달까지 되는 세상이다. 재래시장이 주는 푸근함과 인정보다 사람들은 편리함에 익숙해져 간다.방천시장은 전통 저잣거리를 살리는 취지에서 `문전성시 프로젝트`로 김광석 거리를 조성하였다. 대구광역시와 상인, 예술가 40여 명이 참여하여 주민이 활성화하는, 주민이 후원자가 되는 문화예술 장터로 거듭났다. `우리 마을 향토자원 베스트 30선`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김광석 벽화를 비롯하여 사랑의 자물쇠, 예술품 판매, 먹거리, 공연을 통해 지금은 이 거리가 문화관광명소가 되었다. 김광석 거리를 보고 추억하려는 사람들로 전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 주말이면 거리의 악사들이 펼치는 공연도 가족들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락서-즐겁게 글씨를 쓰다.” 황정숙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수능보다 어려운 안주 고르기”를 보니 웃음이 난다. “애써 힘내도 한숨, 또 한숨만……, 내 어깨의 무게를 잠시나마 잊을 수만 있다면…….” 삶에 지친 어느 가장의 락서 앞에 쉬어 갈 의자 하나 마련해 주고 싶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맞잡는 것이 인생살이의 풍경이 되는 곳, 락서 展에서는 가능하다. “달에 손잡이를 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기발한 생각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좋은 달을 혼자서 보고 잔다.”는 애상 어린 글귀에 눈물이 나려 한다. 늙지 않는 슬픔이 야속하다.대문이 열려 있는 집을 기웃거리다 빨래를 널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이짜서 한 오십 년은 살았제, 그때는 니꺼 내꺼 할 꺼 없이 살았으이. 가차운 이웃이 친척보다 나았제. 마신는 거 하마 콩 한쪽도 농갈라 묵고 무신 일이 생기마 저거 집일 같이 서로 도와가며 살았제. 인자 그카던 사람들이 다 떠나고 집집마다 문 걸어 잠그고 살고 있어. 그 시절엔 묵을 끼 엄써도 마음만큼은 따셨는데……. 내도 인자 갈 때가 됐는 갑다. 자꾸마 오래전 일이 생각키는 거 보마.” 할머니 한숨 소리에 집은 더 나직해진다. 이집도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작은 방 앞에 운동화 몇 켤레가 놓여 있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자취했던 기억이 아련하다.손바닥만 한 집에 사람은 많고 화장실은 하나여서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볼일조차 참고 출근해야 했었다. 공중화장실을 방불케 했던 서민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셋방살이하며 주인 눈치는 또 얼마나 살폈던가. 제때 월세를 내도 죄지은 것처럼 도둑고양이가 되어야 했었다. 연탄불이 꺼져도 불 좀 붙여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추운 방에서 오돌오돌 떤 적도 많았다. 자취생 몰래 밑불을 아궁이에 넣어준 좋은 주인도 더러 있었다. 사람 냄새에 묻혀서 독한 연탄가스도 훈훈했던 시절이었다.추억의 문방구점에서는 달고나를 만드느라 한창이다. 국자에 설탕을 넣고 젓가락으로 잘 저은 다음 소다를 섞는다. 굳어지면 설탕 판에 부어 여러 가지 모양 틀로 찍으면 완성이다. 한 남자가 연탄불 위에 놓인 국자를 열심히 젓고 있다. 아이들은 별 모양 틀을 쥐고 신기한 듯 바라본다. 아마도 별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혹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방천시장에서 만들어진 달고나가 아니었을까. 오늘 밤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 새로운 별이 이사를 왔는지.김광석은 1964년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 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노래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전설적인 가수이다. 그의 대표곡으로는 `사랑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등병의 편지` 등이 있으며 2007년에 부른 `서른 즈음에`는 음악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그의 노래는 어디서든 흥얼거릴 수 있는 포크송이다. 세대를 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대로 인생살이가 되는 것 같다며 어느 콘서트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떤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가 이 세상을 떠나 버린 후, 내 서른 몇 해의 날도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노래 가사처럼 마지막 안녕이라는 인사도 남기지 못한 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거리에 서 있다. 그가 그리운 날은 방천시장으로 가보자.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그는 안녕한 세상으로 갔다. 락서 展에서 만난 어느 무명 글쟁이의 글귀가 발목을 잡는다. “당신의 상처는 안녕하신가요.”

2014-09-12

옻 숨결을 느끼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연서 안에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 잔잔히 흐른다. 가슴만 훑고 지나갈 가을이 서럽다. 뜨겁던 열정마저도 타버린 지 오래다. 오는 걸 원치 않아도 오고 가는 걸 잡지 않아도 가버리는 자연의 섭리 앞에 그저 겸허해질 뿐이다. 오래 갇혀 있던 흑백사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역사이다. 낡은 사진첩 속에서 잠자는 시간을 깨워 보련다. 시간이 그림이 되는 그곳으로 마실 여행을 떠난다.아담한 옻골 마실이다. 슬픈 홍자빛 얼굴로 애타게 임을 기다리나. 정자 옆에 소복이 고개 내밀고 서 있는 배롱나무. 백일도 모자란 슬픈 기다림이여. 백일 동안 피어 있다고 어떤 이는 도도하다고 하나 나는 오래도록 지지 않는 그 열정을 사랑하련다. 나른하던 몸이 솔 향에 가뿐해진다. 잡스러운 생각이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부대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마실을 들어서면 수령이 35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시원함을 더한다. 나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이곳의 느티나무도 마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다. 마실 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실에 들어온다는 설이 있었다. 마실 앞에 나무를 심어 액을 막았다. 동쪽에는 양의 기운이 들어오도록 숨을 텄고 서쪽에는 음의 기운이 강해서 숲을 조성하여 삿된 기운을 막았다고 이창환 문화해설사께서 설명하신다. 이제 푯말에 적힌 `비보 숲`이란 뜻이 이해가 간다. `비보(裨補)`란 부족하거나 약한 것을 보태거나 채운다는 뜻이니 상생의 의미일 것이다.대구옻골마실은 산을 등지고 뜬구름이 흐르며 연꽃이 핀 형국이라 하였으니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니겠는가. 옻골, 칠계(漆溪), 칠동(漆洞), 칠원(漆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옻나무가 많았음을 짐작게 한다. 마실 뒤편으로 대암봉이 보인다. 거북이 형상이다. 사람들은 이 봉을 거북바위라 부른다. 예부터 거북바위에서 신령한 기운이 나온다 하여 거북이가 떠나지 않도록 마실 입구에 연못을 파 두었으며, 거북을 바라보고 집을 지은 이들이 있었다. 안 씨 집안이었는데 경주 최씨가 들어오고부터는 이주했다고 한다.1616년(광해 8년) 조선 중기의 학자 최동집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경주 최씨 광정공파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최동집 선생의 호는 대암(臺巖)이다. 사람 마음속에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아마도 발복을 기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최동집 선생의 호에서도 후손들의 번성을 기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종가를 중심으로 20여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귀한 것일수록 깊숙이 갈무리하는 것처럼 종갓집도 마실 안쪽에 위치한다고 했다. 이젠 어느 고택 마실을 가도 종갓집은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종갓집과 가까울수록 촌수가 가까운 친척이, 멀수록 먼 친척이 산다고 한다. 집을 한 채 짓는 데도 필요에 따라 지어진 것을 보면 민초들의 삶과 양반들의 삶은 분별이 있었다. 문화해설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양반문화를 모르고 지나쳤을 부분이다.종갓집 가는 길은 우리나라 아름다운 돌담길 중의 하나이다. 소담하다. 울 밑에 봉숭아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곱게 찧은 봉숭아를 아주까리 잎으로 둘둘 말아 하룻밤 자고 나면 선홍빛으로 물든 손톱이 참 고왔었다. 손가락이 답답해도 잠결에 빼지 않으려고 잠을 설친 기억이 아련하다. 지난 시절은 늘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이 된다.경주 최씨 종가인 백불고택(百弗古宅)은 대구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입향조인 최동집의 손자 최경향이 1694년에 지은 고택으로 대구 지역 가옥 중 가장 오래된 주택 건물이다. 오른편에는 영조 임금의 명을 받아 교정청을 설치하고 반계수록의 최초 교정본을 완료한 장소가 있다. 수록(隨錄)은 우리나라 사회제도, 법전, 국방, 외교, 정치, 일반적인 것을 통틀어 현실에 맞게 기록한 책인데 수록이 지어질 시점에는 백성이 보면 혼란하다 하여 영조는 금서를 내렸다.`백불`은 조선 정조 때 학자인 최흥원의 호이다. 선생은 금서가 되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감복하였었다. 이십 여년이 흐른 다음에야 영조는 교정청을 만들고 최흥원 선생에게 교정 책임을 맡겼다. 완료한 공으로 `사서삼경 언해본`을 하사받았다. 백불암 선생은 그때부터 유형원의 호를 따서 `반계수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이 마실은 도포 자락 날리며 거들먹거리던 여느 양반가와는 다르다. 벼슬길에 나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학문을 닦고 지역에 많은 덕을 베풀었다. 곳간에서도 인품이 느껴진다. 곡식을 헤아려 근검절약하고 어려운 이웃이나 전쟁이 날 경우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것을 곳간 대문에 붙여 두었다. 경주 최부잣집의 6가지 덕목은 부자나 후세대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 이 마실도 경주 최부잣집과 다를 바 없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글공부를 많이 해서 글로써 교화하라는 항목이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가진 것을 나누기보다는 더 가지려는 게 사람의 욕심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가친척도 돌보지 않는 게 인심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이웃은 가까이에 있지만 마음 거리는 멀기만 하다. 우리는 선조들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나를 반추하고 숨겨진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기도 한다. 좋은 곳을 여행하면서 얻는 추억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어스름이 드는 저녁, 문화해설사가 던진 숙제가 머릿속을 맴돈다. 백불고택의 서까래는 몇 개인가.

2014-09-05

옛 모습 담긴 전설 이야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내 차는 달린다. 노란 우산에 노란 장화를 신은 꼬마가 자박자박 걷는다. 빗물이 통통 튕긴다. 꼬마 뒤를 따라 할머니도 저벅저벅 따라 간다. 한참을 달려도 목적지가 안 나온다. 나비부인의 머릿속에는 입력되지 않은 길이다. 어림짐작으로 나선 길이라서 나비부인을 탓하지도 못한다. 막다른 골목길에 부딪히는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않지만 인생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길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땐 참 난감하다.갈 수만 있다면 큰길로 가길 원한다. 시골 길이 도시처럼 넓은 곳이 얼마나 된다고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몇 번이나 돌면서 망설이다가 농로로 들었다. 우회전하려고 핸들을 돌리는데 돌아가질 않는다. 비는 쏟아지고 내 차는 논 가운데 서 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초록빛 바다다. 계기판에 붉은 기호가 뜬다. 이십 년 이상을 운전했어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옆을 보는 순간 오른쪽에 몇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꼼짝 못 하고 어이없이 차 안에 갇혀있어야 하나. 두려움이 엄습한다.나는 자인면 일언리 마실에 있는 전설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혹시 내가 찾으려고 하는 일언리 마실 상엿집이 있던 자리가 여기였었던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힘이 내 길을 막는 것인가. 머리가 쭈뼛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인면 일언리에는 상엿집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이웃 마실에 가서 상여를 빌려 쓰곤 했다. 의논 끝에 이 마실 사람들도 마을 입구에 있는 도랑 옆에다 상엿집을 지었다. 상엿집을 짓고 난 뒤부터는 어찌 된 일인지 나이 많은 사람도 아닌 청년들이 하나씩 죽어 나갔다. 마실에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영감님이 이 앞을 지나가면서 “상엿집이 마실 앞에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빨리빨리 내보내려고 입구에 있는 것 같으니 틀림없이 사람들이 많이 죽겠구나.”라고 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둘러 상엿집을 마실 뒤에 있는 공동묘지로 옮겼다. 그 후로는 청년들이 더는 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영웅 신화를 읽어 보면 모험을 떠나는 기사들은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모험하기 위해선 그러해야 하리라. 필자는 담이 큰 남자도 아니고 모험심이 강한 여걸도 아니다. 더구나 금기를 위반한 신성한 지역을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난 나쁜 짓을 하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전설 속에서 잠자고 있는 일언리의 마실을 보려고 가는 것뿐이니 내 마음을 읽는다면 길을 열어 주세요.` 다시 핸들을 돌리려고 힘을 줬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핸들이 스르륵 풀린다.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노래서 어떻게 논길을 헤쳐 나왔는지 모르겠다.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찰나에 일어났던 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한 번 그 장소에서 재현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무섭기도 하고 어떤 힘이 노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왔다.미스터리에 빠진 후로는 공황상태였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차가 문제인가 싶어서 카센터에 갔다. 이러저러한 현상이 생겼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봐달라고 했다. 기사는 내 차를 가지고 이십여 분 주행해봤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오라고 했다.인터넷에서 연지의 위치를 검색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 났다. 즐거운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자인 방향으로 드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또다시 포기한다면 일언리의 전설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잠자고 말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검색할 때 봤던 `한민절곡`이 보인다. 나비부인을 보니 한민절곡 옆에 연못 표시가 있다.한참을 걷다 보니 공장 뒤편에 길이 나온다. 버스종점인지 넓은 주차장 아래로 연못이 있다. 순간 아찔했다. 깊은 연못은 아닌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난다. 마치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다른 저수지에는 우중에도 강태공들이 득실거리는데 이 연못은 적요하다.예전에 참으로 못된 시어머니가 있었다. 찌꺼기 밥이 남으면 며느리한테 한 숟갈 주고, 없으면 주지 않아 며느리는 굶기를 예사로 했다. 착한 며느리는 수년을 참고 살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무엇이라도 먹으려고 하면 시어머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를 했다. 며느리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집올 때처럼 연지를 찍고 곱게 단장한 후, 이곳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로 이곳을 연지못이라고 불렀다.▲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는지도 모른다. 나도 어느 집안의 며느리이고 앞으로 며느리를 맞이할 아들을 둔 사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가 행복한 길일까. 나도 시집살이를 겪은 터라 이 못에 몸을 던진 며느리의 아픔에 공감이 간다. 연지는 며느리의 한이 서린 듯 물안개로 뿌옇다. `오죽`이라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경산시 자인면 일언리는 전설이 많은 곳이다. 전설은 전설일 뿐 상여집이 있던 곳도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 수 없고 옛 모습은 찾기가 힘들다. 마실 주변엔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흔적은 가슴에서 산다. 살아온 뒷면마저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나친 욕심일까.

2014-08-29

청동기 시대로 떠난 시간여행

슬쩍 스쳐 지나간 사람을 찾아 나서듯 부지런히 핸들을 돌렸다. 옥곡 마실에 들어섰다. 학원과 음식점, 미용실, 옷집이 즐비하다. 김밥도 사고 길도 물어볼 겸, 김밥집에 들렀다. 아가씨의 건조한 말투가 38도의 무더위를 싸늘하게 한다. 옥곡 마실은 몇 년 전에 지인이 살고 있어서 들린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버스가 자주 다니질 않아서 교통이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상가가 밀집해 있어서 문만 열고 나가면 모든 것이 이 마실 안에서 해결되는 느낌이다. 시선이 상가로 쏠린다.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시속 10km로 액셀레이트를 밟고 있는 것 같다.서울 살 때는 사람들한테 떠밀려 다녀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자연스러웠고 그게 사람 사는 풍경이라고 생각했었다. 대구에 내려와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젠 적막함이 외로워서 분주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옥곡초등학교에서 아파트 단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 공원이 나온다. 도심 속에서 역사의 자취를 발견하는 기쁨은 크다. 사람이 살다 떠난 빈집처럼 발에 풀이 스친다. 화덕 두 개가 있는 시설물은 짓물렀다가 꾸덕꾸덕 마른 얼룩이 선명하다. 공원 안내판 지붕 위에선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안내판이나 유적 모형도 습기가 차서 알아볼 수가 없다.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두근거리던 설렘으로 나선 길이었다. 첫사랑은 가슴에 묻어두어야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던가. 유적공원엔 황량한 바람이 분다.돌널무덤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무성한 풀이 경호라도 하듯 에워싸고 좀체 틈을 주지 않는다. 꼿꼿하게 서서 보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결국은 쪼그리게 한다. 측면으로 보이는 무덤이 참 작다. 이젠 흙으로 주저앉아 역사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버린 시간, 정적이 흐른다.돌널무덤은 고인돌과 함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형식이다. 석관묘라고도 한다. 구덩이를 파고 판돌, 괴석, 할석 등을 써서 돌널을 만들어 주검을 묻는다. 땅 위에 봉토나 상석 같은 표지 시설이 없어서 고인돌보다 발견되는 확률이 낮지만, 우리나라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옥곡동 청동기시대 유적은 경산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대규모 마실 유적이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어느 유적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 이 곳은 2천500~3천년 전 청동기시대에 조상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어서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시간여행일 것이다.유적지 맞은 편 도로변에 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작은 쉼터인가 보다. 오다가다 이웃을 만나 정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기도 하는 공간인 것 같다. 풀 한 포기 없을 정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청동기유적공원과 상반된 모습이다.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직진을 하면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우회전해서 고가다리 밑으로 가면 삼의정(三義亭)과 우경재(寓敬齋)가 있다. 도심을 약간 비켜 있어서 그런지 풀냄새조차 싱그럽다. 짙푸른 초록의 향연에 눈이 시원하다. 계곡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린다. 마음이 시원하게 씻긴다.삼의정은 순 소나무로 지은 사당이며 감룡문과 부속하당, 삼의정, 삼의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의정은 탁와(琢窩) 정기연 선생께서 생전에 여러 집안과 힘을 모아 임진왜란 때, 경산 의병으로 전사한 정변함, 정변호, 정병문 삼 형제의 충의와 학행을 추모하고자 건립한 것이다.임란 때, 많은 무리의 왜적 떼가 쳐들어오자 수령이나 현령은 백성을 팽개치고 달아났다. 삼 형제는 문약한 선비지만 집안의 안위보다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삼 형제는 전란이 끝나고 이곳에서 은거하고 지냈다. 한 가문에 세 사람의 의사가 났다고 영남 일원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삼의사(三義士)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후세대가 지금도 편히 살 수 있지 않을까. 고개가 존경스러움에 저절로 숙여진다.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삼의정이 이런 분을 모신 사당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많이 알고 그분들의 뜻을 오래도록 기렸으면 좋겠다.우경재(寓敬齋)는 삼의정 바로 옆에 있다. 국권침탈을 겪으면서 나라와 두 스승을 잃고 귀향한 정기연 선생에게 형님인 옥파공(玉坡公)이 마련해 준 은둔처이다. 선생은 초계(草溪) 정씨로 삼의사(三義士) 중 한 분인 동암 정변호 공의 9대손이며 한말의 성리학자이다. 경산시 옥곡동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학문으로 후진을 일깨우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우경재 앞 `성암칠절시서사제생(聖巖七絶示書社諸生)`의 시비이다. `성암산 꼭대기가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우리에게 한 번쯤 올라오라 권하네. 가다가 험난해도 두려울 것 없다마는, 띠 풀로 막힌 길을 쉬이 틀까 걱정일 뿐.`옥곡마실은 지형이 골짜기보다 높다고 하여 굼각단, 골짜기에서 옥(玉)이 나왔다고 하여 옥골 혹은 돌산이라고도 불렀다. 경산의 죄를 지은 자를 가두는 감옥이 있어서 옥실, 옥곡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전해진다.인생의 계절은 속절없이 빠르나 8월의 오후는 더디기만 하다.

2014-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