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궁역엔 토끼와 자라가 산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용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궁금증이 인다.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여의주를 들고 서 있는 용왕님이 여행객을 반긴다. 잠수함이 어딘가에서 기다릴 것만 같다. 두리번거리는데 토끼와 자라가 얘기를 주고받는다. 자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용왕의 병을 낫게 하려고 토끼 간을 구하러 육지로 간 자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라 꾐에 넘어간 토끼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까 봐 손에 땀이 흥건했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별주부전을 모티브로 한 `토끼 간 빵` 이야기를 읽지 않고는 이 역을 벗어날 수 없다. 이 빵을 먹고 용왕의 병이 나았다고 하니 토끼 간보다 더 훌륭한 약일 것이다. 그 맛이 궁금해진다. 용궁역에서 금남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 출출하던 참이라 식당을 찾으려고 기웃거렸다. 용궁 순댓집이다. 용궁 순대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서민에게는 값싸고 푸짐한 순댓국밥만 한 것이 없다. 요즘은 미식가들의 입바람으로 오십여 년의 전통을 잇고 있는 용궁순대 맛을 보려고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이다.용궁 순대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부추, 파, 찹쌀, 한약재 등 열 가지의 영양 많고 신선한 재료를 막창에 넣어 직접 손으로 만든다. 특히 비타민과 섬유질, 비타민F로 불리는 리놀산이 많이 함유돼 있어 다이어트는 물론 간장 보호, 중금속 등 독소 해소에 좋은 영양식이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용궁 순대를 먹어 본 적은 없다. 이런 음식을 즐기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시장 구석에 있어서 아이들 눈에는 그리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동기회가 있어서 이 식당을 찾았다. 그때 먹어본 오징어구이의 매콤하고 칼칼한 맛과 순댓국의 구수한 맛이 고향을 찾을 때마다 손을 끈다. 1960년, 70년대의 용궁은 우시장이 따로 열릴 정도로 규모가 대단히 컸었다. 장사꾼들은 이삼십 리가 넘는 곳에서도 소를 사고팔기 위해 용궁 장을 보러 왔다. 장사꾼들은 허리춤에 끼워둔 소 판 돈으로 순댓국밥에 탁배기 한 사발로 요기를 하고 고등어 몇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어린 시절엔 진짜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한 적이 많았다. 만화가가 그린 `인어공주`를 읽으면서 바다 속에서 사는 꿈도 꾸며 용왕님의 병이 빨리 낫기를 빌기도 했다.용궁이 좋아서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고 있다는 양태호(54) 씨를 만났다. 용담소와 용두진으로 안내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시퍼런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물만 봐도 빨려들어 갈 것 같아 소름이 돋던 곳이었다. 어른들은 그곳 근처도 가지 못하게 신신당부를 했었다.“용두암(龍頭岩) 밑으로 소(沼)가 흐르고 있는데 명주실 고리 세 개를 이어도 모자랄 정도로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었다고 해요. 두 소(沼)는 물이 한 번도 마른 적이 없고 용담소와 용두암 사이에는 동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고 어른들이 얘기합디다. 해마다 소(沼)는 많은 사람을 삼키곤 했지요. 신성한 곳인데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서 용이 노한 것이지요. 저하고 가장 친했던 친구도 이 곳에서 빠져 죽었지요.” 여름만 되면 무당들이 짚으로 만든 사람을 들고 울부짖으며 굿을 했던 일이 떠오른다. 양태호 씨는 비 오는 날이면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어서 호기심으로 어린 시절엔 자주 찾았다며 웃었다.“두 소의 물밑은 서로 통할 수 있는 별류천지를 이루고 있어 용두진을 숫용, 용담소를 암용이라 하였는데 두 용이 서로 사랑을 했었나 봐요. 허허, 결국엔 부부가 되었다네요. 이런 전설은 어릴 때는 참 신기했었지요. 실제로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전설은 허무맹랑하기보다는 풍부한 상상력을 심어 주었죠. 그런 덕에 이 고장 사람 몇몇은 작가도 되고 영화감독도 되었죠. 저도 입담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용궁을 소개하고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어요.” 어디서나 있을 법한 전설이지만 양태호 씨의 강한 입담은 흡인력이 있었다. 용궁면(龍宮面)의 지명 유래는 용담소(龍膽沼)와 용두소(龍頭沼)의 두 소룡(沼龍)이 이루어 놓은 수중 용궁(龍宮)과 같이 지상낙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지었다 한다.두 소 가까이에는 세금을 내는 황목근이 있다. 5월에 황색 꽃을 피운다 해서 `황(黃)`이란 성과 `목근(木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목근은 현재 1만2천232㎡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약 백여 년 전부터 마실 사람들이 성미를 모아 마련한 공동 재산을 이 나무에 등기 이전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이에 따라 황목근은 토지를 소유하며 세금을 내는 나무가 되었다. 마흔 가구 남짓한 금원 마실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 자정에 황목근 앞에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공동 재산을 마련한 것이 나무에 재산을 넘기게 된 계기이다. 황목근의 논에는 마실 사람이 농사를 짓고 해마다 그 돈으로 금원리 마실 출신의 중학생에게 한 해 삼십만 원씩 장학금을 준다. 동화 같은 마실이다. 자라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시켜놓고 기차가 오길 기다려 본다. 철길 옆에 때 이른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있다.
2014-08-08
▲ 김근혜 대구행복의 전화 소장땀이 송글송글 맺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정표가 잘 보이지 않아서 지나치고 말았다. 길을 헤매다 겨우 들어선 곳도 차가 다닐 수 없는 자전거 길이었다. 이정표가 있어도 헤매는데 우리네 인생길은 얼마나 많고 많은 길을 돌고 휘돌아 가는가. 신현리 마실 가는 길도 수월하지가 않았다. 갈 때는 보이지 않던 길이 다시 되돌아서서 천천히 보니 보였다. 여행길조차도 마음은 성급하기만 하다.성황당 바로 앞, 돌 고갯길이 나온다.`꿀떡 고개`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여행객들에게 막걸리 한잔 하라며 손짓한다. 푸근한 정에 이끌려 덥석 앉았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으니까 어르신 중 한 분이 이 고개 넘기가 힘들어서`꼴딱 고개`라고도 한다며 막걸리를 건넨다.어르신들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동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고개에는 꿀떡을 파는 떡점이 있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 사이에서는 이 꿀떡 고개에서 꿀떡을 먹으면 급제한다 해서 너도나도 꿀떡을 사서 먹었다고 한다.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의 마음은 꿀떡에라도 주문을 걸며 매달리지 않았을까. 절박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헤아려진다. 꿀떡을 먹고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에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꿀떡 고개는 영남대로 중 통행이 가장 빈번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길손이 많아 쉬어가곤 했을 주막이 보인다. 지금은 옛 모습만 재현한 주막이다. 이 고개는 숨겨진 사연이 많다. 깊은 산중이라 도적 떼를 만나 가진 돈 모두 빼앗기고 섧게 울며 이 고개를 넘기도 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중에 돈이 다 떨어져서 한양도 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며 주막에 며칠씩 외상으로 묵으며 하인이 돈을 가져오길 기다리기도 했다. 급제한 사람은 웃으며 돌아오고 과거에 떨어진 사람은 울며 넘던 고갯길이었다. 꿀떡 고개는 시간의 상흔과 소망이 교차하던 길이다.꿀떡고개에는 성황당이 있다. 신현리 마실의 수호신이기도 하며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던 선비나 보부상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성황당 앞에는 불에 타다만 반쪽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의병장 이강년 선생이 1896년 일본군과 고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화재를 입은 나무이다.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한다. 여행객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린다. 성황당이다. 그렇잖아도 성황당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인지라 궁금하던 차였다.한 맺힌 처녀 귀신 이야기다. 옛날 과거 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 묵다가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과거 길에 올랐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선비는 급제했으나 약속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수년을 보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를 기다리다 지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그 후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당한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선비는 그제야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 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성황당에서 곧바로 길을 들면 석현성과 고모산성, 토끼비리가 나온다. 고모산성은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경계하기 위함이고 석현성은 고모산성의 남쪽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 쌓은 성이다. 토끼비리는 진남교반 절경 속에 감춰진 `한국의 차마고도`로 불린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기다 길이 막혀 헤매고 있을 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좇아 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영남대로 옛길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2007년 국내 최초로 명승 제31호로 지정됐다.옛날 영남대로를 따라 문경새재로 오르기 위해선 이 길을 통과해야 했다. 토끼비리는 밀양의 작원 잔도, 양산의 황산 잔도와 더불어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중 하나다. 가파른 절벽 아래로 영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발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라서 굴러떨어지기 십상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아슬아슬한 벼리를 지나 한양을 오갔다.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지나면서 1천년이 넘는 동안 짚신에 닳은 바윗길이 대리석처럼 윤이 난다. `비리`는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좁은 벼랑을 뜻하는 `벼루`의 사투리다.고모산성에서 바라다보이는 진남교반은 경북 8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태극 형상으로 어우러진 가운데 철교와 3개의 교량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철 따라 변하는 모습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해서 `문경의 소금강`으로도 불린다.신현리 마실은 그 자체로서 문화적 가치가 높다. 자녀들과 역사의 현장을 걸으며 옛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2014-08-01
내시를 만나러 간다. 따가운 햇살 사이로 바람이 인다. 비가 그친 뒤라서 그런지 여름날치고는 시원하다. 말간 하늘이 모내기해 놓은 논에 드러누웠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웃을 만들고 이웃과 이웃이 만나 마실이 된다.대구에서 청도 남산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 굽이를 돌 때마다 인생 고갯길 같던 이 길이 도로 확장을 하느라 분주하다. 앞으로는 평탄한 인생길을 예고라도 하듯 탄탄대로다.마실엔 국밥집 아주머니 같은 질박한 정이 흐른다. 도시의 삭막함을 버리고 마음이 울울할 땐, 사람 냄새 맡으며 마실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으리라.시끄러운 마음자리를 가라앉히기에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서로 보듬고 어울려 사는 모습에서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도 든다.퇴근길에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소주 한잔을 곁들여 먹는 국밥. 빈자들이 잠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넉넉함이 묻어나는 곳. 국밥집 서정이 듬뿍 묻어 있는 곳이 바로 마실 풍경이 아닐까.청도 임당리 마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택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가 웃으면서 다가와 어디를 찾느냐고 말을 건넨다. 도시 사람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따스한 정이 흐른다.넓은 논과 몇백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우람하고 당당하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듯 넉넉한 마을이다. 김 씨 고택을 찾아가는 동안 밀성 박씨 삼우정파 종중소장문적을 보관해 둔 사당과 여러 고택이 있다. 마실 어귀에 차를 대놓고 5분 정도 걸어가면 내시 고택을 만날 수 있다.담장을 끼고 고택을 돌아본다. 그네를 타고 있는 처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듯 담장의 곡선미가 눈을 끈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발을 들여 놓았다. 시원하고 넓은 고택이다. 고대광실은 이런 집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게다.역사 속에서만 대했던 아득한 내시 세계가 펼쳐진다. 내시 집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청도임당리김씨고택이 처음이라고 한다. 중요문화재 245호이며 18~19세기 궁중 내시 김일준이 통정대부 정3품까지 지내고 낙향하여 보낸 곳이다.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 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 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왔다고 한다.김일준은 이곳에 터를 잡고 어떤 세계를 꿈꾸었을까. 외로운 성전에 거대한 정적이 흐른다. 사랑채 대문에 난 작은 구멍, 그 구멍으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김일준은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로 남기보다는 왕의 수족으로 남고자 함이 컸던 것 같다. 서북향으로 고개를 틀고 있는 고택에서 그의 단심이 보인다.내시는 왕의 수족으로 평생 육체적인 결함과 마음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이다. 이 집에서 살던 사람들은 다 한 많은 세월을 살지 않았을까. 이 고택은 여성의 동선을 제한하려는 내시가의 건축 구조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았던 여성조차도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으랴.넓은 마당에 풀 한 포기 없다. 풀로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그런 주인의 마음이 서려 있는 듯해서 짠해진다. 고대광실이면 무엇하리. 누옥이라도 마음 편히 사는 것이 복이 아닐까.사극으로만 대하던 우리나라 내시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잠시 마루에 걸터앉아 생각에 빠져 본다. 암막에 가려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시가 기록상으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내시 역사도 천 년이 훨씬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시가 되기 위한 사설양성소도 있었다고 한다. 그 무대에 쇠귀 할머니가 있다.고려 초의 구전된 얘기로는 재산이 아주 많은 쇠귀 할머니가 살았다고 한다. 쇠귀 할머니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불행히도 고자여서 근심하던 할머니는 높은 곳에 뒷돈을 대서 궁궐에 내시 벼슬을 얻게 된다. 세도가가 된 내시는 이후 양자를 들이는데 그 첫째 조건이 고자여야 된다는 것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민초들은 자기 자식을 억지로 고자를 만들기도 했으며 돈을 받고 양자를 들이는 악습도 생겼다고 한다. 쇠귀 할머니는 내시가 되기 위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몸가짐과 궁중의 법도, 경국대전 등 다양한 교육을 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김일준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당당한 남성으로 살지 못하고 뼈아픈 시대를 산 것 같아 한쪽 가슴이 저려온다. 400여 년의 한을 안고 서 있는 고택에서 그들의 역사를 읽어 봤다. 내시가 우리 땅에서 사라진 것은 국권침탈이 있기 두 해 전이라고 한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청을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했다. 청도임당리김씨고택 내시들의 묘소는 마을 뒤의 재궁산, 중솔산과 운문면 묵방동의 안산에 산재해 있다고 한다. 천상에서나마 행복하길 기원하며 걸음을 돌렸다.
201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