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정치판은 조선시대의 예송논쟁과 비슷하다.
국가관, 친일, 과거사진상규명, 고구려사 문제와 수도이전 등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해있다.
이 같은 정치권의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갈등과 논란은 결국 국론분열로 이어져 국가경제파탄은 물론 국가위기를 자초할까 심히 우려된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 예송논쟁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는 지혜의 눈을 떠보자.
예송논쟁은 현종, 숙종시대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2차에 걸쳐 일어난 남인, 서인간의 논쟁을 말한다.
1659년(효종10), 효종이 죽자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을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복제가 문제된 것은 효종임금이 가통으로는 차자(次子)가되고 왕통으로는 적자(嫡子)가 되므로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 복을 입는 기간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3년 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다.
이를 두고 서인인 송시열(宋時烈) 등은 효종이 자의대비에게는 둘째 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지만 사종지설(四種之說)중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돼 기년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남인인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 3년 상을 치러야한다고 팽팽히 맞섰다.
이런 가운데 윤휴는 예설(禮設)을 지어 송시열 등이 대륜(大倫)을 어지럽게 했다고 공격을 가했고, 윤선도(尹善道)는 소를 올려 송시열 일파는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나눠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서인들은 윤선도의 예혼을 모함으로 다뤄 유배시켜 버렸다.
그 뒤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제문제라는 단순한 전례문제로 논의됐지만 실제로는 서인세력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남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논제로 비화됐다.
결국 이러한 1차 예송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막내아들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정책대립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후 1673년(현종14)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이 다시 문제가 돼 불거졌다.
서인은 1차 예송 때의 주장과 같이 효종비를 차자부(次子婦)로 다뤄 대공(大功)을 주장한 반면에 남인은 장자부로 다뤄 기년을 주장해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났다.
이 갑인예송에서 남인과 연결, 송시열을 제거한 김우명(金佑明) 등은 남인의 기년설을 찬성해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상으로 정했고 숙종이 즉위하자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를 반대한 서인들은 송시열의 구명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숙종 6년에 허적(許積) 등을 역모로 내몰아 남인세력을 제거하는 등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사건으로 예송은 일단락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예송논쟁의 주요골자이다.
특히 예송은 17세기에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 실현 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이다.
그러나 2차 예송을 거치면서 대의확립(大義確立)이라는 본래의 명분에서 벗어나 붕당정치의 정치적 사건으로 전개돼 정치적으로 실익 없는 정쟁으로 비화돼 국민만 도탄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시대 예송논쟁을 거울삼아 오늘의 우리 정치인들도 현실정치 즉, 경제 살리기에 주력해 주길 바란다.
독선과 아집은 병이다. 국민은 삶의 희망을 잃고 절규하고 있다.
대의정치의 차원에서 정치도 국민의 관심에 기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정치요 국민을 위한 정치다.
<이택용 ·구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