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참꽃이 찬란하던 날.

봄꽃들이 이어달리기 중이다. 매화가 첫 스타트를 끊자마자 살구꽃도 바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누군가 골목길에 하얀 꽃잎이 떨어져 있어서 벌써 목련이 피었나 싶어 달려가 보니 프링글스였다고 해서 웃었더니 며칠 뒤 목련이 담장 위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벚꽃이 뭉싯뭉싯 길거리를 누비는가 했는데 사과꽃이 뒤를 쫓았다.

봄꽃 이어달리기의 최고 유망주는 참꽃이다. 그 꽃을 품은 곳, 몇 년을 벼르다 또 코로나가 느닷없이 닥쳐 며칠 더 고민하다 찾아간 곳이 비슬산이었다. 산 정상이 참꽃 군락지라 우리 동네 뒷산의 진달래보다 몇 주는 늦게 핀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매일 올라가 보면 피기 시작하는 것도 절정일 때도 다 볼 수 있지만, 마음을 내서 가야 하는 거리라 가장 아름다운 날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맘때면 되겠지하며 나선 길이다.

2020년 4월 셋째 주말, 도심에서 벗어나 산 입구부터 연두의 물결이다. 차창을 열고 산의 냄새를 맡으며 달리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참꽃이 목적이지만 그냥 이렇게 찾아가는 길까지 드라이브 코스부터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게 했다. 한참을 봄빛에 취해 오르니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상까지 모두 차를 끌고 가지 말고 중턱에 놓고 가란 뜻이다.

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걸어서 천천히 산을 훑으며 오르는 것, 다음은 셔틀버스와 전기차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표를 예매하니 벌써 우리 앞에 많은 손님이 있어서 한 시간 후에 표가 최선이었다. 표를 사놓고 공영주차장 옆으로 난 등산로를 둘러보기로 했다. 연달래가 이제 왔느냐고 몇 잎 남은 꽃으로 아쉬운 눈인사를 했다. 지난가을 떨어져 쌓인 나무들의 비늘이 만든 푹신한 길을 걷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 전기차를 탈 시간이었다.

셔틀버스도 좋지만 우린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전기차를 탔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 때마다 짙은 분홍빛의 참꽃들이 골짜기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함께 간 언니의 탄성을 들었는지 봄의 물을 올려 새순을 틔운 나무들도 몸을 흔들었다. 어느덧 차는 산꼭대기에 자리한 대견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절 마당 가장자리는 너럭바위로 이어진 절벽이었다. 그 위에 파란 하늘을 이고 삼층탑이 앉았다. 뭉게구름 한 점 탑에 걸어놓고 인증샷을 마구 찍었다. 어느 방향이나 절경이다.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했나 싶은 맑은 날씨였다.

절 뒤로 난 계단을 올랐다. 올라서자마자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산정상에 찐분홍 참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큰 나무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오로지 키 낮은 참꽃들만 어깨를 맞대고 있어서 하나님이 비슬산 정상을 칠하실 때에 분홍 물감 하나만 준비해도 되어 좋았을 것 같다. 마음껏 꽃분홍물을 흩뿌리셨다. 그 사이로 등산객들을 위한 나무 데크길이 나 있어서 분홍 물결 사이를 헤엄쳐 다녔다. 한껏 참꽃의 분홍향을 들이마셨다. 두어 시간 꽃밭에 노닐다 보니 볼이 발그레해진 기분이 들었다. 좋다 좋아 읊조리며 이 좋은 풍경을 매년 보러 오자는 다짐을 했었다.

밤새 비가 나린다. 하루하루 꽃 피는 모습이 다른 요즘, 빗소리에 꽃이 질까 잠을 설쳤다. 올해는 달성군에서 비슬산의 참꽃 군락지에 CCTV를 설치해 매일 더 피어나는 꽃송이들의 질주를 생중계로 보여주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붉은 것이 주말에 다니러 가면 절정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밤새 올봄 마지막 한파가 닥쳤다. 눈뜨자마자 유튜브를 켜서 참꽃이 어찌 되었나 살피니 붉던 산자락이 희끄무레하다. 아무리 화무십일홍이라지만 그렇게 붉던 어제의 꽃들이 추위를 못 견디고 다 스러지다니.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지난해보다 일주일 이상 다른 꽃들이 피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말이다. 올봄은 한발 먼저 온다고 다른 꽃들이 귀띔하는 걸 귀담아 마음 담아 들었어야 했다. 스러진 참꽃이 CCTV 화면을 통해 내년에 다시 오겠노라 작별 인사로 까만 손을 흔든다. 필 때 오라니깐 하며. /김순희(수필가)